성경말씀: 요한계시록 3:14~20
14.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
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설교: 주님의 음성을 듣고 문을 연 자의 축복
이것도 저것도 아닌 상태, 어중간한 상태는 가장 위험한 상태입니다.
세상에서도 열정이 없는 사람들은 오히려 열정이 있는 사람까지 싸늘하게 만드는 방해물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심령에 불이 붙어야 합니다. 미지근한 신앙생활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어떠합니까? 예수믿는 사람, 그리스도인을 분류하는 방법에는 여러 방법이 있습니다. ‘육신의 사람(자연인),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 성령에 속한 사람’으로 분류합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말씀은 예수님을 중심으로 세 종류의 사람들로 나눕니다. ‘예수님을 문밖에 세워둔 신자, 마음 문을 열고 모셔 들인 신자, 주님의 즐거움에 동참하는 신자’가 있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하나님의 백성입니까? 우리는 어떤 신자입니까? 말씀 가운데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시고, 이에 응답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선 예수님을 문밖에 세워둔 신자에 대해 이야기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에베소서 2:12 말씀입니다.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것은 우리들의 예수님을 믿기 전의 모습입니다. 이런 불신자는 예수님과 상관이 없는 자들이지만 불신자 중에 아직 구원받을 자들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문밖에 세워둔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불신자들은 간접적으로 예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신자들을 통해 불신자의 문을 두드립니다. 제가 이 남촌동에 와서 노방전도를 하다보면, 교회 사람을 만나 전도 안당해본 사람이 없습니다. ‘교회’ ‘예수님’ ‘하나님’에 대해 안 들어본 사람이 없습니다. 심지어, 어떤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어떤 교회에서 와서 자꾸 가자고 해서 거의 차에 실려서 교회에 가보고 거기서 이상한 이야기를 들었다고 할 정도입니다. 이렇게 복음을 안 들어본 사람이 없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왜 불신자들이 우리나라에 이렇게 많습니까? 한국의 기독교인인 단지 인구의 20%에도 못 미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복음을 들었으나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복음을 들은 사람들이 자신의 마음 문을 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불신자 뿐 아닙니다. 예수님을 문밖에 세워둔 신자나 교회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문 밖에 세워둔 교회나 신자는 어떤 사람들인가요?
첫째, 신앙생활에 미지근한 교회나 신자입니다. 15~16절 말씀입니다.
15.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구절을 읽을 때, 뜨거운 것은 열심히 믿는 것이고 차가운 것은 안 믿는 것이라고 하면서, 믿든지 안 믿든지 둘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이 귀찮은 사람은 ‘차든지 덥든지 하라고 했으니, 에라 나는 아무래도 찬 쪽을 택해야겠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교회를 안 다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라오디게아 도시의 식생활 풍속을 보면 그들은 뜨거운 물을 먹든지 아니면 차가운 물을 마셨습니다. 미지근한 물은 아예 마실 수 없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들은 제단에서 사용하는 물도 뜨거운 물 또는 차가운 물을 사용했습니다. 절대로 미지근한 물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러한 풍속이 생겼는지 라오디게아의 지리적 측면을 보면 분명해집니다.
라오디게아라는 도시는 히에라볼리라는 도시와 골로새 도시와 약 11km 를 거리로 하여 정삼각형처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특히 히에라볼리는 온천 도시였는데, 히에라볼리 외곽은 그 사면이 석회로 된 절벽으로 둘러 싸여 있었습니다. 따라서 도시 전체가 석회 때문에 하얀 얼음으로 뒤덮인 듯 엄청나게 아름다웠습니다. 히에라볼리 온천 도시에서는 그 땅 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샘물이 펄펄 끓어올랐습니다. 그래서 그 물로 목욕도 하고 차게 식혀서 먹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샘의 물은 그곳에서부터 약 11km정도 떨어진 라오디게아 도시로 흘러내려 오면서 뜨거운 것도 아니고 찬 것도 아닌, 미지근한 상태의 물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이 미지근한 물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물이 됩니다. 왜냐하면, 히에라볼리의 석회질이 11km 를 따라 흘러온 그 미지근한 물속에 들어가 있기 때문에 석회질 때문에 먹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목욕할 수도 없는 물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 쓸데없어 버릴 수밖에 없는 물! 그것이 본문이 말하는 석회질로 가득한 미지근한 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의 차지도 더웁지도 않다는 말은 하나님 앞에서 전혀 쓸모가 없는 교회 또는 성도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15절의 뜻은, “너는 지금 매우 쓸모없는 미지근한 상태에 있으니, 마실 수 있는 차가운 물이 되던지 아니면 제단에 드릴 뜨거운 물이 되던지 아무튼 쓸모 있는 신자가 되라”라는 의미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5장에서 이와 비슷한 내용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마 5:13) 맛을 잃은 소금은 오늘 본문의 아무 쓸데없는 미지근한 물과 같은 개념입니다.
이제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를 내 입에서 토하여 내치겠다. 나는 너와 전혀 상관하지 않겠다.” 다시 말씀드리면, 교회나 교인이 하나님께 아무런 쓸모 없는 존재가 될 때, 즉 ‘미지근한 상태’에 계속 거할 때, 주님은 그 교회를 버리시고 떠나시겠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스스로 부요하다고 자만하는 교회나 신자가 바로 예수님을 문밖에 세워두는 사람들입니다. 17~18절입니다.
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17절을 보면 주님께서 말씀하시길, 미지근한 자들은 착각하길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과 참된 복음의 사람들은 그 사람을 인정하지 않는데, 오직 자기만 스스로를 인정합니다.
한번은 과거에 교회를 잘 다니다가 이제는 더 이상 교회를 다니지 않는 어떤 분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저는 그분께 다시 교회를 다니시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이 때 그분께서 아주 무뚝뚝한 대답을 하셨습니다. 자신의 입으로 스스로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신앙이 좋습니다. 사실 배울 것이 없어서 교회를 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저는 그 분이 매우 교만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그러나 실제로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가련한 영적 거지임을 보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분은 자신의 영적 상태를 제대로 진단할 능력조차 없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 신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처럼, 불쌍하고 가련한 처지에 있는데도 그들은 스스로 부자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영적으로 메마르고, 봉사와 구제를 한다면서 공적을 쌓아 스스로 만족하고 있습니다.
또 반면에 미지근한 상태의 이 라오디게아 교회는 주님을 위한 희생과 고생을 회피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8절에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라”고 하셨습니다. 즉, 고난과 수고를 통하여 믿음이 불로 연단한 금처럼 되는 것인데, 이들은 그러지를 못하고 오히려 믿음의 시련이 오면 쉽게 포기하고 희생과 수고가 없는 쉬운 길을 택하였던 것입니다.
현대 교회를 보면, 라오디게아 교회의 모습과 아주 흡사합니다. 즉, 예수를 믿되 편히 믿고 쉽게 믿으려는 자세로 가득차 있습니다. 신앙을 위해서 생명까지 바쳐야 정상이건만 신앙은 오히려 삶의 악세서리 정도로 여기고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위해 가족도 주시고 먹고 살 수 있도록 음식도 주시고 온갖 좋은 것을 주셨습니다. 심지어 자기 생명까지 바쳐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성령 안에서 영생까지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님의 은혜를 다 망각하고 이기심과 우상에 빠져 주를 위한 희생과 고생을 회피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세상을 위해 신앙을 팔아먹고 죄에 빠지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인들처럼 교회는 다니지만 영적인 안일함과 게으름과 습관적인 죄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예전에 제가 컴퓨터 수리를 하러 갔었는데, 수리하시는 분이 제가 젊은 목사다 보니, 열성적이신 권사님 아내에 대해 불만을 토로 하십니다. 휴일이 되거나 쉬는 날이 되면 아내랑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은데, 하루 종일 교회에 있다는 것입니다. 아이들까지도 하루 종일 교회에 있다 보니, 자신은 가정의 평화를 위해 오전 예배 다녀오고 집에서 텔레비전을 보거나 등산을 갔다 온다고 하면서, 도대체 ‘내가 왜 이렇게 사나’라는 생각이 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진지하게 말을 했더니, 잠시 생각하던 부인이 교회에서 놀면 되지 않겠느냐, 자신에게 혼란을 준다며 이 남편보고 ‘사단’이라고 했다 합니다. 얼마나 상처가 되었을까요? 교회에서 하루 종일 신앙 생활하는 것에 대해 긍지와 자부심, 그리고 내가 얼마나 하나님을 잘 믿고 있는지 스스로 안심하면서 사시는 권사님에게 이 남편의 말은 참으로 ‘사단’의 유혹과 같았겠습니다. 그러나 혹시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스스로가 예수님은 어디 계시는지, 어떻게 하고 계시는지 생각은 없고, 자신이 이렇게 얼마나 하나님께 잘 하고 있는지에만 신경 쓰고 있지는 않습니까? 출애굽기 25장에 보면, 모세는 시내 산으로 하나님을 만나러 갈 때 이스라엘 백성들을 잘 돌보고, 그 일들을 잘 맡기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중요합니까? 교회 일이 중요합니까? 온전히 예수님이 우리 인생의 처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이 예수님께만 향해 있으려면 우리의 마음 문을 열어 예수님이 보아야 합니다. 20절 말씀입니다.
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영국화가 홀만 헌트가 1853년에 그린 유명한 그림 "세상의 빛"이란 그림이 있습니다. 여기서 보면, 머리에 가시관을 쓰신 예수님께서 등불을 들고 계시고 덩굴나무들이 우거진 벽 가운데 나무문이 하나 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희한한 것은 거기에는 손잡이가 없습니다. 다만 문 위쪽에 자그마하게 열린 창이 하나 있을 뿐입니다. 그 곳으로 예수님께서 ‘문을 열라’고 말씀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그림은 오늘 핵심말씀인 계시록 3장 20절과 참으로 딱 들어맞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마음의 문을 열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리고 들어가 우리와 함께 더불어 먹고 사시겠다는 축복을 주시겠다고 합니다. 이런 귀한 초청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첫째로, 예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향하여 늘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관심을 기울이지 아니하고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음성을 들어야 문을 열 수 있습니다. 왜냐면 아무에게나 문을 열어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주 사단들은 우리의 마음 문 앞에 와서 여러 가지 음성으로 유혹하고 그 유혹에 넘어가 고통 가운데 있게 만듭니다.
자기 맘대로 문을 열었다 닫았다하는 사람은 실패한 인생을 살게될 사람입니다. 아무에게나 마음 문을 여는 사람에게 신앙의 위기가 찾아옵니다. 하와는 사탄 앞에서 문을 열어 두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문을 닫았기 때문에 사탄의 유혹에 빠지고 말았습니다.(창3:1-5) 아담은 아내 앞에서는 문을 열어두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문을 닫았기 때문에 함께 타락하고 말았습니다. 지금도 문을 두드리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회개하고 주님을 영접하십시다.
셋째, 주님과 함께 즐거워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계 3:20 뒷부분에 "나는 너로 더불어 먹고, 너는 나로 더불어 먹는다"는 표현은 깊은 교제를 의미합니다.
주님께서 들어오셔서 함께 하십니다. 세상에서 잘 살려고 욕심을 내어 살았더니 사람들이 손가락질하고 천하디 천한 세리라고 놀림 받던 삭개오를 아실 것입니다. 이 삭개오가 예수님께서 친히 삭개오의 집에 오시고 함께 거하니까 어떻게 되었습니까? 삭개오는 그 어떤 사람의 손가락질도 비난도 천대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그와 함께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하는 것만 하고 싶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함께 하시면 세상이 주는 행복, 평안 그 모든 것들에게서 자유로워지고 진짜 축복을 받으며 그 행복을 누리며 살게 됩니다.
이 시간 진정 우리는 누구와 함께 있어야 하겠습니까? 주님과 함께 있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의 걱정 근심을 문 앞에 두고 주님을 맞이하지 못했다면 문 두드리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모든 걸 두고 나아가 주님을 맞이하여 함께 하시는 그 축복을 누리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은혜로우신 주님! 우리를 구원하시고 축복하시려고 우리의 마음 문을 두드리시며 그 음성을 들려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세상의 모든 짐을 내려놓고 주님을 맞이합니다. 우리의 마음 문을 엽니다. 우리의 영안을 열어주시고 우리와 늘 함께 하셔서 하늘나라의 축복을 이 땅에서도 누리며 살게 하옵소서. 이 모든 말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받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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