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사도행전 16: 35~40
35. 날이 새매 상관들이 부하를 보내어 이 사람들을 놓으라 하니
36. 간수가 그 말대로 바울에게 말하되 상관들이 사람을 보내어 너희를 놓으라 하였으니 이제는 나가서 평안히 가라 하거늘
37. 바울이 이르되 로마 사람인 우리를 죄도 정하지 아니하고 공중 앞에서 때리고 옥에 가두었다가 이제는 가만히 내보내고자 하느냐 아니라 그들이 친히 와서 우리를 데리고 나가야 하리라 한대
38. 부하들이 이 말을 상관들에게 보고하니 그들이 로마 사람이라 하는 말을 듣고 두려워하여
39. 와서 권하여 데리고 나가 그 성에서 떠나기를 청하니
40. 두 사람이 옥에서 나와 루디아의 집에 들어가서 형제들을 만나 보고 위로하고 가니라
설교: 위로하고 떠나니라
진정한 위로는 어떤 위로일까요?
예전에 제가 대학교를 다닐 때 재미있었던 경험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요즘에야 어학연수다 외국여행이다 해서 외국을 나가는 것이 흔하지만, 제가 대학 다닐 때에는 외국 나가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우연히 저의 고모부께서 아시는 선교사님 한 분이 영국에 계셨습니다. 제가 당시 신학을 공부할 것인가 아닌가 방황하고 있을 터이라, 부모님께서 방학동안 가서 선교사님을 만나 마음을 잡고 오라고 어렵게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기간을 지나서 어학연수를 하고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갔다 왔더니 은근히 제가 영국에 갔다 왔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한 해, 두 해가 지나고, 한 친구 중에 집안 사정이 어려워서 고민하고 있는 친구가 있어서 친구들이 이 친구를 위로하였습니다. 저도 너무나 안타까워서 “그래... 얼마나 힘들어, 그래도 힘을 내고 이 힘든 기간 견디면 좋은 일이 있을 거야..”
그랬더니 옆에 있던 친구가 못 참겠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야... 영국에도 갔다온 네가 눈물 젖은 밥을 먹어봤어?”
한 마디로 ‘외국 나갈 정도로 돈 걱정 없이 어려운 걸 모르는 네가 무얼 안다고 떠드느냐!’는 말이지요. 순간 위로하는 진심도 안 알아주는 친구의 말이 화가 나서 저도 말했습니다. “눈물 젖은 밥은 못 먹어봤어도, 비에 젖은 빵은 먹어봤어!”
고생한 번 해본 적 없다고 말하던 친구가 저도 영국에서 돈없어 식당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비 맞으면서 빵먹고 다녔다는 소리에 할 말이 없는지 빤히 쳐다만 보았습니다.
우리가 받고 싶어 하는 위로는 우리를 잘 알고 우리를 잘 이해하고 우리를 진심으로 받아주는 그런 위로일 것입니다. 이런 위로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할 것입니다.
오늘, 감옥에까지 갇히는 고난을 억울하게 당했음에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간수에게 전하고 그와 그 가족들을 구원케하는 일에 바울과 실라가 사용되었음을 봅니다. 그리고 또 다시 잡혀갈 위기에 있어서도 지혜롭게 대처합니다. 또 빌립보에서 주님의 복음을 전하다가 바울과 실라와 같이 갇히거나 고난을 당할 수도 있는 회심한 루디아집안 사람들을 위로하고 바울과 실라는 떠납니다.
오늘 주시는 말씀 가운데 신앙생활하면서 겪어야할 많은 어려움과 고난 가운데에서도 힘들어하거나 속상해 하지말고, 위로를 주시는 주님의 은혜를 이 시간 경험하시기를 바랍니다.
35절입니다.
35. 날이 새매 상관들이 부하를 보내어 이 사람들을 놓으라 하니
오늘 말씀은 '날이 새매'라는 표현으로 시작합니다. 이는 "날이 밝았다."는 단순한 의미로 해석하면 안 됩니다. 헬라문화적 표현으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뜻입니다. 한 언어학자는 이를 씨앗의 발아로 비유합니다. 씨앗 하나가 심어지고 발아하고 자라서 열매를 맺습니다. 그리고 열매가 맺힌 시점부터는 전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듭니다. 열매는 잘 포장되어 판매되어 학비에 보탬이 되거나 농부가 그 자리에서 먹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만났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경험합니다. 그러나 그냥 보기에 우리의 겉세상은 변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법칙대로 나이도 들어가고 사회가 돌아가는 데로 같이 움직이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영혼의 시간은 주님의 은혜를 경험한 그 시간부터 새로운 시작으로 바뀌었습니다. 잘못된 곳을 향하여 세상 사람들이 가는 데로 밀려가다가 제대로 바른 곳을 향하여 가게 된 것입니다.
교회 다닌다고 무엇이 확 바뀌거나 그러지 않습니다.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고 해서 무언가 확 나타나지도 않습니다. 기도를 시작했다고 해서 엄청난 일이 눈앞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정말로 영적으로 일을 시작하시고 또 행하시고 또 이루어내십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미세하게 변화되어 보이지만, 영적인 그 놀라운 사역은 앞으로의 행복을 위해 계속 차근차근 쌓여져 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늘 기도와 말씀으로 주님의 행하신 일을 찬양하면서 ‘날이 새는’ 그 지점을 알고 또 새로운 시작을 향해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이어서 보겠습니다. 36절입니다.
36. 간수가 그 말대로 바울에게 말하되 상관들이 사람을 보내어 너희를 놓으라 하였으니 이제는 나가서 평안히 가라 하거늘
여기서 '놓으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풀어준다는 말입니다.
왜 풀어준다고 했을까요? 탈출한 죄수들입니다. 그런데 간수의 집에 있습니다. 이 모든 상황을 알고서 상관들이 겁이 났을까요? 아니면 일이 커지면 귀찮아지니 사건을 덮어버리려고 빌립보에서 나가라는 말일까요?
추측컨대, 여기서 '놓으라'는 의미는 굉장한 경멸의 의미일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생각해보면, "그놈들을 놔두면 무슨 일 있을지 모르겠다. 그냥 빨리 풀어줘 버려라."
상관들의 생각에 바울과 실라는 재판하고 감옥에 가두는 과정도 참으로 찜찜했을 것입니다. 성 안을 소란스럽게 한다는 귀신들렸던 여종의 주인들의 말로 죄를 물었지만, 자기들도 이 주인들이 바울과 실라에게 누명을 씌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이러는 가운데 매질을 하고 감옥에 넣었으니 기분이 썩 좋지 않았을 것입니다. “에이 대충 고생시켰다가 주인들의 분노가 좀 가라앉으면 자기들 나라로 쫒아보내야지”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우연치 않게 큰 지진이 일어나 감옥문이 열리고 이 죄수들이 풀려나지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 이 죄수들을 지키던 간수의 집에 가서 씻고 편하게 있다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초자연적인 기적이 일어난 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괜히 이 사람들이 신의 사람들인데 잘못 건드렸다가 신의 노여움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날이 새자마자, 상관들이 “그것들을 당장 소문나기 전에 내보내라!”라고 명령한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모든 일들이 잘 마무리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여기에다 불을 던집니다. 36~39절입니다.
36 간수가 그 말대로 바울에게 말하되 상관들이 사람을 보내어 너희를 놓으라 하였으니 [이제는 나가서 평안히 가라] 하거늘
37 바울이 이르되 [로마 사람인 우리]를 죄도 정하지 아니하고 공중 앞에서 때리고 옥에 가두었다가 이제는 가만히 내보내고자 하느냐 아니라 그들이 친히 와서 우리를 데리고 나가야 하리라 한 대
38. 부하들이 이 말을 상관들에게 보고하니 그들이 로마 사람이라 하는 말을 듣고 두려워하여
39. 와서 권하여 데리고 나가 그 성에서 떠나기를 청하니
일이 잘 마무리되었습니다. 그런데 왜 바울은 굳이 자신이 로마인이라고 밝혔을까요? 이렇게 밝힐 것이었다면, 감옥에 가기 전에 자신이 로마인이라고 밝혔어야 했습니다. 매맞을 거 다 맞고 감옥에 가서 쇠고랑차고 난 뒤 왜 굳이 로마인이라는 것을 밝히면서 빌립보 관리들이 데리러와서 자신들을 빌립보 성 밖으로 내보라고 당당히 요구하는 걸까요?
바울과 실라가 로마 사람의 신분을 밝히고 행정관들을 오도록 한 이유는 단순히 억울한 일을 당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일전에 이보다 더한 핍박도 받았었고, 또한 빌립보에서 이미 채찍에 맞고 감옥에까지 갇히면서도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이제 와서 자신이 로마 사람이라고 말을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남은 사람들을 위한 배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천한 사람들만이 믿는 것이 아니며, 함부로 대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방법으로 자신이 로마 시민임을 드러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일로 인하여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위상이 올라갔음은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조금이라도 복음을 전하고 복음이 뿌리내리게 하기 위해 애쓰는 바울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책임있게 믿음의 자리를 만들어놓고 바울은 어떻게 했습니까? 40절입니다.
40. 두 사람이 옥에서 나와 루디아의 집에 들어가서 형제들을 만나 보고 위로하고 가니라
바울은 이 일이 있은 후에 루디아의 집에 들어가 형제들을 만나고 이들을 위로하고 떠납니다. 이들은 헤어짐에 대하여 아쉬워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과 같은 이들이 남아 있어 주기를 간절히 고대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일행은 그곳을 떠났고 이제부터는 빌립보 사람들만이 남아서 그들의 믿음의 교제를 계속하게 될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바울은 참으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해보면, 지금 갓 태어난 간난 아이와 같은 빌립보 교인들입니다. 말씀도, 믿음도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한 루디아와 간수 그리고 이들의 집안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런 이들을 주님께 맡기고 떠났습니다. 그리고 믿음의 자리가 흔들리지 않도록 자신이 로마인이라는 것을 밝히고 후에 이런 신앙적 박해가 오지 않도록 미리 막아놓았습니다.
이렇게 빌립보 성도들이 보다 안전하게 그들의 믿음을 지속하게 하기 위한 바울의 배려는 우리가 마땅히 배워야 할 자세입니다.
예전에 제가 부교역자로 있던 교회에 전도왕이 있었습니다. 한 해에 한 명도 전도하기 어려운데 100명 넘게 전도하시던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그 전도의 수고를 좀 갚아드리고자 성지순례도 보내드렸습니다. 그런데 이 전도한 사람들 중 교회에 정착하여 신앙생활한 사람은 몇 명이었을까요? 단 10명도 남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믿음의 자리를 마련해주고 주님께 이들의 영혼을 맡긴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고도 훌륭한 일입니다.
바울은 이런 점에서 보면, 참으로 참된 주님의 사도입니다. 그는 과거의 영광을 모두 버린 자입니다. 그는 오히려 자신의 삶 가운데 과거의 일들이 드러날 것을 두려워하는 자였습니다. 그의 지식과 명예, 그리고 그의 신분까지도 그는 드러내는 것을 오히려 꺼려하며 이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오직 복음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빌립보 지역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과 같이 바울은 자신의 사역을 지속하면서 성도들을 보호하고 이들을 위하는 일이라면 자신의 가진 자그마한 것이라도 드러내어 이들로 하여금 세상에서 안전하게 믿음의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분량대로 일하고 과감히 주님께서 일하시도록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진정한 위로는 무엇일까요? 주님의 은혜를 받고 주님을 섬기며 살아갈 때 우리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주님께서 맡겨주신 영혼들을 주신 재능과 힘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그 때에 진정한 위로가 주 안에서 서로에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재능으로 돕는 자나, 그 도움을 받는 자나 다 주님의 은혜 가운데 평안을 얻을 것입니다.
이런 위로가 우리 안에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우리 안에 역사하시고 은혜와 축복을 부어주시는 주님! 오늘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으로 힘을 얻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에 세상적인 잣대로 난도질하며 주님의 이름을 부르짖었던 것 용서하여 주소서. 우리가 세상 가운데에서 받는 상처를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으로 치유하여주시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위로의 사람들을 만나게 하셔서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데 전혀 부족함이 없도록 성령으로 이끄소서. 이 모든 말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받들어 기도드립니다. 아멘.
'온누리선교교회 > 한국어예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도행전 강해 73) 예수는 그리스도 (수요예배 20151007) (0) | 2015.10.07 |
---|---|
주님의 음성을 듣고 문을 연 자의 축복 (주일예배 20151004) (0) | 2015.10.02 |
영혼과 육신이 풍성해 지는 비결 (주일예배 20150927) (0) | 2015.09.26 |
사도행전강해 71)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수요예배 20150923) (0) | 2015.09.22 |
악하고 게으른 종아! (주일예배 20150920) (0) | 2015.09.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