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사도행전 21: 27~36
27. 그 이레가 거의 차매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모든 무리를 충동하여 그를 붙들고
28.외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 곳을 비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혔다 하니
29.이는 그들이 전에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시내에 있음을 보고 바울이 그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줄로 생각함이러라
30.온 성이 소동하여 백성이 달려와 모여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니 문들이 곧 닫히더라
31.그들이 그를 죽이려 할 때에 온 예루살렘이 요란하다는 소문이 군대의 천부장에게 들리매
32.그가 급히 군인들과 백부장들을 거느리고 달려 내려가니 그들이 천부장과 군인들을 보고 바울 치기를 그치는지라
33.이에 천부장이 가까이 가서 바울을 잡아 두 쇠사슬로 결박하라 명하고 그가 누구이며 그가 무슨 일을 하였느냐 물으니
34.무리 가운데서 어떤 이는 이런 말로, 어떤 이는 저런 말로 소리 치거늘 천부장이 소동으로 말미암아 진상을 알 수 없어 그를 영내로 데려가라 명하니라
35.바울이 층대에 이를 때에 무리의 폭행으로 말미암아 군사들에게 들려가니
36.이는 백성의 무리가 그를 없이하자고 외치며 따라 감이러라
설교: 왜 고난을 당하는가!
얼마 전에 제가 티비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습니다. “나쁜 기억을 지워드립니다!”라는 방에 들어가 자신이 살면서 나빴던 기억을 이야기하고 적고 지워버리는 것이었습니다.
한 청년이 들어왔습니다. 어린 시절에 왕따를 당하였습니다. 그것도 초등학교 3학년때부터 시작하여서 고등학교 2학년때까지 계속 되었다고 합니다. 이유도 모릅니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저 얼굴이 까매서였습니다.
견디다 못해 학교를 그만 두었습니다. 그리고 대학로에서 사진과 음악일을 하면서 지내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왕따의 고통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말할 것이 있다면 말해주라는 말에 “무기력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했습니다.
무기력해지지 않았았으면 좋겠어요~
너무나 고통이 지속되면 무기력해지고 나중에는 따돌림시키는 사람들이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문제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무기력해지지말고 고통에 맞서서 싸울줄도 알아야 후회도 없다는 말이었습니다.
우리도 때때로 알 수 없는 고통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왜 이런 고통을 당해야 되는지, 내가 왜 이렇듯 억울하게 고생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세상에는 납득이 가는 일보다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 더 많습니다. 흔히들 말합니다. 남의 일에 대해서는 잘 설명할 수가 있는데 내가 당한 일에 대해서는 설명할 재주가 없습니다. 왜 내가 이런 고통을 당해야 되는지 그것을 알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는 사도 바울이 체포되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읽어보아도 그가 체포되어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을 죽이겠다고 하는데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왜 죽여야 됩니까? 왜 바울이 없어야만 살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까? 다른 것이 아닙니다. 죽이겠다는 말은, 저가 죽어야 내가 산다는 것입니다. 저가 죽어야 내가 편안하다는 것입니다. 동물들도 이렇게까지는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악에 차서 아무 죄없는 바울을 죽이려고 합니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전하는 바울이 없어야 편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사단의 종들입니다. 바울이 죽어 없어져야 가장 좋은 영적인 세력들은 바로 사단들입니다.
스스로를 속여가면서 하나님을 높인다는 유대인들이 지금 사도바울을 죽이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 안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바울을 고난 가운데 두시고, 또 고난 가운데에서 보호하시는지 보면서 우리가 고난 가운데에 있을 때 어떤 믿음으로 감당해야하는지 아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7~30절의 말씀입니다.
27. 그 이레가 거의 차매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모든 무리를 충동하여 그를 붙들고
28.외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 곳을 비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혔다 하니
29.이는 그들이 전에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시내에 있음을 보고 바울이 그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줄로 생각함이러라
30.온 성이 소동하여 백성이 달려와 모여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니 문들이 곧 닫히더라
예루살렘 교회 장로들이 말한데로 네 사람을 데리고 돈을 다 지불하면서 율법을 지켰는데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성전에서 유대인들이 바울을 보자마자 흥분하여 달려들어 죽이려한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상황인가요?
보통 결례는 한달 가량 걸리는데 이 결례는 일주일이 걸렸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 네 사람을 데리고 결례가 다 끝났다는 것을 신고하기 위해 성전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그 성전에 아시아에서 부터 온 유대인들이 바울을 보았습니다. 이 유대인들은 루스드라에서 바울을 돌로 치고 데살로니가와 에베소에서 바울을 따라다니며 핍박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바울이 성전에 있는 것을 보고 바울을 잡았습니다. 그리고는 무리를 충동했습니다. 바울에 대해 하는 말이, “이 사람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곳 (성전)을 비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렵혔다.”고 했습니다. 구약 신명기 23:3과 느헤미야 13:1에 보시면 모압과 암몬 족속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한다고 되어 있는데 예레미야 애가 1:10에는 모든 이방인까지로 범위를 확대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 간에 당시에는 이방인이 성전에 들어오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실은 바울이 이방인을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이 사람들이 전에 이방인인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와 바울이 예루살렘 시내에 있었던 것을 보고 그 사람을 성전에도 데리고 들러갔을 것이라고 오해를 한 것입니다. 이 드로비모는 에베소에서 바울과 함께 복음을 전하던 사람으로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 때에 함께 온 사람으로 (행 20:4) 성전에 들어간 적이 없습니다. 이 유대인들은 원래 바울을 미워했으니 어떤 상황을 보면 일부러 없던 것 까지도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전후 상황은 듣지도 않고 유대인들은 이 사람들의 말을 듣고 확인도 없이 그냥 소동하여 바울을 잡아 성전에서 끌고 나갑니다. 바울이 오해 때문에 예루살렘에서 잡혀서 고난을 당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사도 바울의 모습입니다.
바울은 의연합니다. 한 구절도 두려워했다거나 변명을 한 구절이 없습니다. 물론 갑작스런 상황에 놀라 말문이 막혀서 그저 끌려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끌려가면서도 반항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 전에도 유대인들에게 공격을 당할 때에도 변론의 기회를 달라며 당당히 요구한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저 성난 폭군과도 같은 사람들 손에 잡혀가도 아무런 반항도 변명도 하지 않았습니다.
학식과 지혜, 그리고 담대함을 가지고 있는 바울이 왜 이렇게 행동했을까요? 저는 그가 지혜로웠기에 이렇게 행동했을 것이라 봅니다. 만약에 여기서 그 어떤 행동이라도 했으면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위험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또한 그는 이미 예루살렘으로 가면 잡혀서 로마로 끌려가 죽음을 당할 것이라는 예언도 들었습니다. 이미 각오가 되어있었을 것입니다. 네 사람의 나실인 서약에 대한 대가를 치룬 것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럼으로 이렇게 끌려간다해서 잘못된 것이 없었을 것이라 여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온전히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만 이 억울한 상황에서도 이렇게 의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제 돌아가신 옥한음 목사님의 설교를 재구성해 놓은 동영상을 유튜브에서 보았습니다. 거기서 목사님께서 강하게 선포하시길, “믿음이 있다고 말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만이 믿음이 있는 자이며, 복종하는 자만이 하나님의 구원을 얻은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난 믿었으니 구원을 얻는다는 그런 가벼운 신앙으로 살지 마십시오!”
‘하나님께 복종도 하지 않으면서 믿음이 있다고 구원받았다고 하는 사람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자녀인가’라고 도전을 주는 말씀이었습니다.
과연 우리도 바울과 같이 이 억울한 상황에서 주님만 먼저 보고, 주님께 복종할 수 있는가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주님께서 물어보고 계십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더 우리 신앙을 돌아보면서 계속 말씀을 이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31~36절의 말씀입니다.
31.그들이 그를 죽이려 할 때에 온 예루살렘이 요란하다는 소문이 군대의 천부장에게 들리매
32.그가 급히 군인들과 백부장들을 거느리고 달려 내려가니 그들이 천부장과 군인들을 보고 바울 치기를 그치는지라
33.이에 천부장이 가까이 가서 바울을 잡아 두 쇠사슬로 결박하라 명하고 그가 누구이며 그가 무슨 일을 하였느냐 물으니
34.무리 가운데서 어떤 이는 이런 말로, 어떤 이는 저런 말로 소리 치거늘 천부장이 소동으로 말미암아 진상을 알 수 없어 그를 영내로 데려가라 명하니라
35.바울이 층대에 이를 때에 무리의 폭행으로 말미암아 군사들에게 들려가니
36.이는 백성의 무리가 그를 없이하자고 외치며 따라 감이러라
자, 이대로 두면 바울은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 스데반처럼 돌에 맞아 죽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죽도록 내버려두시지 않고, 로마 백부장과 천부장을 보내어 보호하십니다. 백부장과 천부장이 오니까, 흥분한 사람들이 죽이지 않습니다. 죽이려고 하다가 멈추었습니다. 왜 멈추었느냐,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만일에 백부장이 보는 데서 돌로 쳐죽였다면 이것은 로마법을 어기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돌을 든 사람이나, 처형한 사람들은 로마법에 의해서 벌을 받아야 합니다. 로마의 법이 행사되는 시기였으므로 저들은 바울을 죽이려던 행동을 멈추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로마 군인에게 체포됩니다. 하지만 로마군인들이, 백부장과 천부장이 바울을 체포하려고 체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놓아두면 바울이 죽겠으니까, 살인이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해서, 혹시 이것 때문에 폭동이 생기지 않기 위해서 바울을 보호하기 위해서 체포합니다. 그리고 뒤에 보면 2년 동안을 재판도 없이 가이사랴에 가두어둡니다.
로마 입장에서는 바울을 풀어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 않기로 맹세한 사람들까지 있습니다. 이렇게 좌우간 바울을 죽이려고 벼르고 벼르면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내놓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2년이 흘러갑니다. 바울이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사자 같은 바울이, 그야말로 소리소리 지르면서 복음 전해야 할 사람이 이렇다 저렇다 재판도 없이 이렇게 갇혀 있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그는 로마에 상소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로 가게 됩니다.
바울이 왜 고난을 당합니까?
우리가 왜 고난을 당합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고난을 통하여 뜻을 이루실 때도 있습니다.
그 고난이 도리어 우리의 영혼을 살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사단의 권세가 우리를 괴롭힐 때 하나님께서는 저 천국의 문을 열어놓고 계심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고난 가운데 있는 축복을 발견할 수 있는 영적인 눈이 열려야 합니다. 좋은 것을 좋은 것으로 보고 귀한 것을 귀하게 여길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 가운데 고난 만을 바라보지 않고 이를 통해 이루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아시는 귀한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권능의 하나님! 우리가 주 앞에 두 손 모아 순종의 자세로 나왔습니다. 고난 가운데에서도 은혜가운에서도 주님의 뜻만을 위하여 살아갈 수 있도록 하옵시고, 복종의 자세로 이 사단의 세력에서 우리를 돌보시고 축복하옵소서! 이 모든 말씀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받들어 기도드립니다. 아멘.
'온누리선교교회 > 한국어예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도행전 강해 93) 준비되어 있는 자가 쓰임받다 (수요예배 20160316) (0) | 2016.03.16 |
---|---|
미스바의 회개 (주일예배 20160313) (0) | 2016.03.12 |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주일예배 20160306) (0) | 2016.03.05 |
사도행전 강해 91) 끝까지 순종하는 자세 (수요예배 20160302) (0) | 2016.03.02 |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주일예배 20160228) (0) | 2016.02.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