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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강해 100) 바울의 송사 (수요예배 20160511)

by 온누리선교 2016. 5. 11.

성경본문: 사도행전 24:1~9

1.닷새 후에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어떤 장로들과 한 변호사 더둘로와 함께 내려와서 총독 앞에서 바울을 고발하니라

2.바울을 부르매 더둘로가 고발하여 이르되

3.벨릭스 각하여 우리가 당신을 힘입어 태평을 누리고 또 이 민족이 당신의 선견으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로 개선된 것을 우리가 어느 모양으로나 어느 곳에서나 크게 감사하나이다

4.당신을 더 괴롭게 아니하려 하여 우리가 대강 여짜옵나니 관용하여 들으시기를 원하나이다

5.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전염병 같은 자라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을 다 소요하게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

6.그가 또 성전을 더럽게 하려 하므로 우리가 잡았사오니 (6하반-8상반 없음)

7.

8.당신이 친히 그를 심문하시면 우리가 고발하는 이 모든 일을 아실 수 있나이다 하니

9.유대인들도 이에 참가하여 이 말이 옳다 주장하니라




설교: 바울에 대한 송사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좋은 뜻으로는 여기저기에 다 사용될 수 있는 아주 실용적이고 쓸모 있는 것을 말할 때 이 말을 씁니다. 그러나 또 나쁜 뜻으로는 법이 있기는 하지만 법도 마음대로 해석하기 나름으로 큰 잘못도 작은 잘못으로 해주고, 심지어 무죄로 만들기도 한다는 말로 쓰이기도 합니다.

세상 일이 어제나 오늘이나 다 똑같은 것 같습니다. 진짜, 진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자신한테 유리한지 불리한지에 따라 움직입니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육신의 생각’이라고 말합니다. 로마서 8장 5~6절 말씀에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우리가 주님의 복음을 들고 영의 생각에 따라 나아가는 바울의 이야기를 지금까지 사도행전을 통해 듣고 있습니다. 지금 커다란 장벽에 가로막혔습니다. 육신의 생각을 따르는 자들로 인하여 복음이 가로막힐 위험에 처해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신앙생활하면서 이러한 상황들을 겪습니다. 세상이 사망의 길로 나아가는 육신의 생각을 가지고 있을 때 하나님을 섬기며 영의 생각을 가지는 일은 좀처럼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육신의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고, 평안을 주지 않음을 알게 하십니다. 오늘 더둘로와 벨릭스 총독을 통해서 세상이 주는 육신의 생각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 그 본질을 바울에 대한 송사를 통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4절입니다.

1.닷새 후에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어떤 장로들과 한 변호사 더둘로와 함께 내려와서 총독 앞에서 바울을 고발하니라

2.바울을 부르매 더둘로가 고발하여 이르되

3.벨릭스 각하여 우리가 당신을 힘입어 태평을 누리고 또 이 민족이 당신의 선견으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로 개선된 것을 우리가 어느 모양으로나 어느 곳에서나 크게 감사하나이다

4.당신을 더 괴롭게 아니하려 하여 우리가 대강 여짜옵나니 관용하여 들으시기를 원하나이다

 

오늘 본문을 보니, 바울의 일에 육신의 생각으로 똘똘 뭉친 사람들로 인해 방해 받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첫 번째 인물은 바로 벨릭스 총독입니다. 이 총독은 유대에서 온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을 고소한 사건에 대해서 아주 뻔하고 뻔한 사실을 무려 2년이나 바울을 가이사랴에 구류해 두며 처리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려는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을 뿐 아니라 더 직접적으로는 바울에게서 돈을 받으려고 그렇게 한 것입니다. 벨릭스 한 사람의 잘못된 생각 때문에 예수의 복음이 무려 2년이나 지체 되었습니다.

 

총독 벨릭스는 A.D.52-60년까지 8년간 유대를 다스렸던 자입니다. 노예가 자유인이 되어 총독까지 된 자수성가한 대단한 사람인데 아주 부도덕하고 무자비하고 음흉한 자였습니다. 벨릭스는 유대인들의 반란에 무자비하게 진압했고 대제사장을 살해했으며 타인의 아내를 빼앗아 결혼했고 불의한 재물을 쌓은 자였습니다. 또한 그의 성품은 천하고 경멸할 만하였습니다. 역사서에 의하면 벨릭스는 “각종 색욕과 잔인한 행위를 행함에 있어서 노예의 기질을 가지고 왕권을 행사하였다” (타키투스, “역사”, 제5장)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육신의 생각으로 모든 판단을 하는 총독으로 인해서 바울이 아주 부당한 재판에 서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 인물은 더둘로입니다. 바울이 가이사랴에 도착한 지 5일 후에 유대인들은 바울을 고소하기 위해서 요즘의 변호사 역할을 하는 변사 더둘로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왔습니다. 그리고 소송은 아주 빨리 진행되었습니다. 바울은 회중 앞에 나오게 되었고, 더둘로는 바울을 송사하기 위한 진술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로마총독인 벨릭스에게 사실과 공의에 대한 진실을 이야기하기 보다는 진술은 간단히 하고 아첨을 하는 것이 소송에서 이길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 더둘로는 벨릭스 총독을 칭찬하는 연설을 하였습니다. (3절) 그리고 이어서 바울에 대한 의혹만 늘어놓았습니다.

첫째, 반란을 선동하여 유대인들에게 질서를 무너뜨리고 소요를 일으킬 빌미를 제공한다는 것, 둘째 나사렛 예수라고 일컫는 이단을 추종하고 전파한다는 것, 셋째, 유대인의 법에서 사형에 해당하는 성전을 더럽히는 죄를 범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바울이 로마법상으로나(반란죄) 유대법상으로(성전모독죄) 사형에 해당된다는 고소인 것입니다. 이 세 가지 고발 내용 중 첫 번째 내용이 로마인에게는 가장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더군다나 당시 벨릭스가 통치하는 동안 유대인에는 여러 소요 사건이 일어나 그 주동자들을 계속 학살하였던 벨릭스의 입장을 잘 알고 있으므로 무엇보다도 ‘반란 음모’를 우선적 죄목으로 내세운 것입니다. 바울의 죄목이라고 늘어놓은 것들 중에 실제로 유대인들에게 위협이 될만한 것은 두 번째 ‘나사렛 예수’뿐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오랫동안 성서와 역사 가운데 기다려왔던 메시야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꾸어서 생각해보면, 왜 이것이 유대인들에게 위협인지 이상합니다. 나사렛 예수께서 하늘에 올라가시기 전에 많은 유대인들이 ‘선생’이라 부르며, 심지어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실 때, ‘호산나’를 외치면서 환영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나사렛 예수가 이단이며, 헛된 것을 터트리고 다닌다고 비난하면서 막습니다. 이런 일의 안에서 무엇인가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5~9절 말씀입니다.

 

5.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전염병 같은 자라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을 다 소요하게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

6.그가 또 성전을 더럽게 하려 하므로 우리가 잡았사오니 (6하반-8상반 없음)

7.

8.당신이 친히 그를 심문하시면 우리가 고발하는 이 모든 일을 아실 수 있나이다 하니

9.유대인들도 이에 참가하여 이 말이 옳다 주장하니라

 

바울을 어떤 사람이라고 말합니까? “염병”과 “소요케 하는 자”라고 말합니다. “염병”은 ‘전염병’, ‘골칫거리’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소요케 하는” 이라는 말은 기존의 질서를 뒤엎는 작용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오히려 기독교인을 두려워하고 있는 유대인들에 대해 간접적으로 보여줍니다. 얼마나 복음이 빠르게 확산되었으면 그것이 전염병과 같았고, 또한 사단이 주는 거짓 평화와 질서를 깨뜨리며 많은 백성들이 복음에 반응할 정도였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바울은 혼자였고, 감옥에 있었고, 심지어 매를 맞고 재판에 서게 되었지만, 여전히 유대인들에게는 두려운 존재였습니다.

 

이러한 파급력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할까요?

코카콜라 회사는 ‘Coca Cola colonization’이라는 전략을 가지고 있습니다. ‘코카 콜라 식민지’라는 말입니다. 모든 나라에 코카콜라 지사를 세우겠다는 전략입니다. 유엔 가입국 수보다 코카콜라 지사가 있는 나라가 더 많습니다. 미국이 수교하고 있는 나라보다 코카콜라 회사가 수교하고 있는 나라가 더 많습니다. 그래서 ‘코카콜라가 길을 뚫으면 그 뒤를 미국 대사가 따라 들어온다’라는 말이 생길 정도입니다. 코카콜라를 마시는 데에는 계절이 없습니다. 100년이 조금 넘은 코카콜라와 2000년 된 복음을 비교하면 복음은 부끄러움을 느껴야 합니다. 코카콜라는 초마다 4만 명의 입에 넣어집니다. 그러나 코카콜라는 비만을 야기해서 생명을 단축시키지만 복음은 영생을 주는 것입니다. 세상에 생명을 전하고 또 이것이 널리 퍼져 ‘코카콜라 식민지’가 아닌 ‘예수 식민지(Jesus colonization)’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위해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바울과 같이 사단이 두려워하는 복음의 사도로, 복음의 전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실제로 중국 선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떤 가난한 중국인이 멀리 선교사를 찾아와 세례를 받고 싶다고 했습니다. 선교사가 그에게 어디서 복음을 듣게 되었느냐고 묻자 그는 '저는 아직 복음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복음을 보았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는 선교사의 의문을 풀어 주려는 듯 영파에 사는 한 가난한 사람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 사람은 한때 아편 중독자에다 매우 격한 성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기독교에 접하면서부터 그의 모든 생활이 변화된 것입니다. 그는 아편을 끊었고 친절하고 상냥한 성격의 소유자가 되었습니다. 나는 바로 그를 통해 복음을 본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복음이 보이는 성도가 되어져야합니다. 오늘날에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복음을 듣기는 하지만 보지 못함으로 주님께 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영의 생각을 가진 자들은 육신의 생각을 가진 자들과 다른 모습을 보여주여야 합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바울이 억울하고 부당하게 송사를 받습니다.

이 송사는 결코 정당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육신의 생각으로 가득찬 로마총독 벨릭스와 유대인편 변호사 더둘로의 짜고치는 정치놀음이었습니다. 어떤 면에서 바울을 압박하고 감옥에 쳐넣고 때려도 스스로가 잘못이 없다고 하니, 벨릭스의 요구를 슬슬 들어주면서 유대인들이 벨릭스를 시켜 로마시민권을 가진 바울을 고문하면 너무 괴로워서 스스로 없던 죄도 있다고 하게 만들 작정이었습니다. 바울은 결코 성전을 더럽힌 적이 없습니다. 이방인을 데리고 성전에 간 적도 없습니다. 도리어 성전에서 율법에 따라 거룩한 나실인의 결례를 행하고 제물을 드렸습니다. 복음을 변질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핍박을 면하려는 것으로 바울이 유대인들을 자극할 일을 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거짓 앞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동조하는지 재판정은 온통 바울을 정죄하는 분위기입니다.

이러한 가운데에서 바울을 통해 복음의 가치는 서서히 나오기 시작합니다. 어둠이 있는 곳에 빛이 있으면 그 빛은 더 환하여 보이고, 더 잘 보입니다. 부당한 바울의 송사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공의를 세우시고, 또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보이십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핏값으로 산 하나님의 영적인 자녀들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생각으로 이 세상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바울을 둘러싼 육적인 생각을 가진 자들이 얼마나 허무한 인생을 사는 것을 깨닫고 복음을 들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은혜로우신 주님!

우리가 주의 말씀을 들고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 살게 하옵소서! 육신의 생각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얻고 평안을 누리며 사는 영적인 생각으로 가득차 살게 하옵소서! 성령이여 오셔서 우리에게 이러한 축복이 넘치게 하시고 하나님 나라에서 말씀에 순종하며 살게 하옵소서! 이 모든 말씀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