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요한복음 12:12~19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것을 듣고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보고 타시니
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무리가 증언한지라
이에 무리가 예수를 맞음은 이 표적 행하심을 들었음이러라
바리새인들이 서로 말하되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 데 없다 보라 온 세상이 그를 따르는도다 하니라
설교: 나귀를 타고 오시는 만왕의 왕 예수
제가 성지순례 하던 중에 이집트와 요르단 쪽을 가보니, 정말 길거리에 개보다 많은 동물이 바로 당나귀였습니다. 이 지역에서는 어린 아이도 나귀등에 안장 없이 타고 다니는 것이 자주 눈에 띠었습니다. 이 나귀란 동물은 어찌 보면 아주 사람들에게 성실하고 우직한 동물입니다. 자신의 몸무게에 10배 이상의 짐을 들어 올리고 실어 나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다치게 하거나 해롭게 하지 않고 주인에게 우둔할 정도로 충성을 다하는 동물입니다. 무엇이든지 실어 나릅니다. 돌도, 닭도, 심지어 물동이도 나릅니다. 물도 별로 없는 광야지역, 험난한 돌산도 이 나귀는 주인을 위해 엄청난 무게의 짐을 나릅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사람들이 욕을 할 때 가장 심한 욕이 “이 나귀 같은 놈아!”입니다. 한 가지밖에 모르고, 한 길밖에 모르는 그런, 이용당해도 그저 순전한 마음으로 따르는 그런 모습이 인간에게는 같잖아 보이고, 천해보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나귀는 앞에서 말했다시피 자신 몸무게의 10배 이상의 물건을 싣고 나르는 아주 힘세고 능력 있는 동물입니다. 그러니, 멍청하다고 놀림 받는 동물, 가장 가엾은 동물이기도 합니다.
지금도 나귀가 하찮게 여겨지지만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으로 가실 때 마차도 아니고, 말도 아닌 가장 하찮은 나귀를 타고 가셨습니다.
수많은 무리의 사람들이 대추야자나무 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흔들면서 ‘호산나’를 소리 높여 외쳤습니다.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스라엘 왕”이라는 가장 화려한 환영을 받으면서 하찮은 나귀를 타셨습니다. 그리고 그 모습대로 많은 사람들 앞에서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갔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을까요?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어디로 가야할까요? 우리는 높은 곳으로 갈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나귀를 타실만큼 가장 낮은 곳에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진정 이 세상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가장 겸손한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가장 진실하고 가장 복되신 주님의 모습을 보면서 은혜 받는 이 시간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3절입니다.
13.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로마의 압제 속에 있던 유대인들에게 유월절은 민족의 해방을 기다리는 절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라는 말은 하나님의 구원을 간절히 바라는, 예전부터 내려오던 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호산나 [hosanna]”말의 뜻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당신께 구하오니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호산나!”라고 외치는 순간 그 사람의 마음에는 “기쁨과 승리”, “구원의 희망” 등의 마음이 밖으로 다 나와 버리며, 그 소원이 이루어짐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사람들이 어떤 때 외쳤습니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떤 모습으로 예루살렘성에 들어 오셨을까요?
예수님께서는 당나귀를 그것도 어린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 성안으로 아주 초라하게 들어오셨습니다. 당시 예수님께서 하나님 말씀도 잘 가르치시고, 병든 자도 고치시고, 기적도 보이신다는 등등 좋은 소문이 성 안의 모든 사람들에게 퍼져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한류스타 빅뱅이 공항에서 나오는데 멋진 공항패션을 입고, 많은 기자들에 둘러싸여 나와야지 허름한 이민가방 들고 청바지에 티셔츠 입고 나오면 그것이 말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그 어떠한 전차도, 그 화려한 마차도 택하지 아니하시고 어린 나귀를 선택하여 타시고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셨습니다.
왜 하필 어린 나귀일까요? 15절 함께 보시겠습니다.
15. 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첫째,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받은 사명, 구약의 예언을 이루기 위해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입’으로 활동한 수많은 선지자가 있었지만 그중에서 예수님은 으뜸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타실 나귀는 한번도 세상적인 욕심으로 사용되지 않아야 했고, 주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심으로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을 이루셨습니다(슥 9:9). 비록 로마 군병들이 탄 말에 비해 초라해 보일지 몰라도 여태껏 한 번도 사람을 태워 본 일이 없는 나귀 새끼를 타신 것은 그 분이 세상의 욕망에 찌들은 지도자가 아니고, 고결한 인격자이시며 하나님의 주권과 계시의 선포자이라는 것을 증명해줍니다.
이 말이 잘 이해가 가지 않으십니까?
영국의 프리처박사에게 한 전도자가 가서 “어떻게 하면 영국에서 제일 유명한 전도자가 되겠습니까?”라고 물었답니다. 그때 박사의 말은 “영국에서 제일 작은 자”가 되라고 하였다합니다. 세상의 잣대가 아닌 하나님의 잣대에서 순수함을 가장 잘 간직하고 주님의 일에 사용되려면 세상에서 가장 작은 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온전히 능력을 부어주시어 하나님의 일에 사용하신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조건에 예수님께서는 완벽하게 자신을 낮추시고, 하나님께서 쓰시기에 합당케 되셨습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쓰시기에 가장 합당한 겸손한 모습으로 자신을 내어드리는 제사장으로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처음 보았을 때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소개했습니다(요 1:29).
예수님은 구약시대의 제사장과는 구별되는 완전한 제사장이십니다(히 9:11∼12). 많은 사람들 위에서 자랑하려고 군림하려고 오시지 않습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제사장이라며 잘난척 하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제물로서 십자가가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으로 오고 계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환영하는 사람들은 이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께서는 제단 위에 피 흘리는 제물처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릴 것을 알면서도 하나님의 사명을 다하고자하는 그 중심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로 인하여 진심어린 환영과 영광을 받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나귀를 타신 예수님은 만왕의 왕으로 예루살렘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호산나”를 외치던 사람들의 생각은 참으로 세상적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오시면 바로 왕위에 올라 ‘다윗의 무너진 왕조를 회복하시고, 이스라엘의 영광을 회복시켜 달라’는 의미로 함성을 질렀습니다. 예수님께서 풍랑을 잠재우신 초인적인 능력으로 로마를 물리치고, 단번에 해방될 거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기대와는 달랐습니다. 왜냐하면 그 분은 모든 나라에 속하지 않으면서도 모든 나라를 지배하는 왕이십니다. 눈에 보이는 로마제국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사탄의 왕국까지라도 파괴시킬 왕으로 입성하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에 대해 제자들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16~18절입니다.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무리가 증언한지라
이에 무리가 예수를 맞음은 이 표적 행하심을 들었음이러라
만약에 예수님께서도 당대의 인기에 힘입어, 멋진 세상의 왕들처럼 멋진 말들이 끄는 전차를 타고 악기를 다루는 자들과 춤을 추는 자들에 에워싸여 예루살렘에 입성했다면, 아마 우리는 예수님의 진정한 통치를 경험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인간의 눈으로 볼 때 나귀를 탄 모습이 보잘 것 없어 보였지만 하나님께서 진정 내려주시는 권세로 말미암아, 영광을 누리시는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겸손이 빛을 발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보이는 예수님의 입성을 진심으로 바라보고, 그 뜻을 안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6절을 보면, 예수님을 사랑한다며 영원히 함께 하겠다며, 자신의 생업과 가족을 버리고 온 제자들도, 어린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신 예수님의 그 뜻을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성령 충만하여 영안이 열려 예수님의 영광을 경험한 후에야, 오늘 성경본문에 나타난 예수님의 행동과 사람들의 환영을 완전히 이해하였다는 것입니다.
이야기 하나를 소개하면서 말씀을 정리하고자 합니다.
코펜하겐에 있는 한 교회에는 소왈슨이 만든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고 초청하시는 모습의 유명한 예수님의 동상이 서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 동상 앞에서 그 동상을 바라보며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뭐 그렇게 유명한 동상이라고 해서 와 봤더니 별거 없군!" 하며 실망하고 있었습니다. 그 실망하는 모습을 눈치 채고 그 동상을 아주 잘 알고 있는 한 사람이 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 가까이 다가가서 보셔야 돼요. 그리고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올려다보아야 그리스도의 얼굴이 보여요."
그렇습니다. 주님 앞에 무릎을 꿇지 않고는 주님을 볼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무릎을 꿇어야 하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꿇는 행위, 그 자체가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통해, 겸손히 주님 앞에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향해 우리의 눈이 뜨여지길 바랍니다. 우리의 마음이 열려지길 바랍니다. 세상의 화려하고 자극적인 것에 눈이 멀어 이 순수하고, 진정한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왕이신 주님을 멀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만왕의 왕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가장 겸손한 모습으로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분은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기대와 우리의 소망을 뛰어넘으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생각지도 못하는 것, 더 좋은 것으로 우리의 모든 죄악과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분입니다. 기적과 같이 오신 그 분 예수님을 우리를 이 순간 마음속에 받아드리고 그 분이 우리의 인생의 주인이 되심을 간절히 바라고 기뻐하시기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우리의 기대와 달리 우리를 위해 놀라운 일을 행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실 영광의 왕을 환영하며 내 마음에 항상 모시고 사는 자 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악한 사단마귀가 주는 교만함으로 세상에서 실패하며 살지 아니하고, 주님께 배운 겸손함으로 께 날마다 의지하고 함께 사는 복된 하루하루를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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