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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강해 44) 사명을 영광스럽게 여기는 바울 (수요예배 20170802)

by 온누리선교 2017. 8. 2.


성경본문: 로마서 11: 13~16

13.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14. 이는 혹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하게 하여 그들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15. 그들을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

16.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




설교: 사명을 영광스럽게 여기는 바울

어제 제가 조나단 몽크라는 72세의 선교학자의 세미나를 듣고 왔습니다. 그 분의 할아버지 할머니가 폴란드에서 유대인 박해를 피해 캐나다로 이주했고 아버지가 아프리카에서 건축기사로 일하여 아프리카에서 자랐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지금은 캐나다의 작은 마을에서 난민들을 위해 살고 있습니다. 시리아 난민으로부터 시작하여 베트남 난민, 아프리카 난민들이 캐나다로 와서 적응하는 기간 동안 자기부부의 침실을 내어주고 자신들은 지하실에서 자면서 몇 달 몇 년이든 원할 때까지 살면서 도와주고 있습니다. 자신이 다니는 교회에도 이러한 헌신자들이 있는데 교회재정의 60%를 이런 난민, 이주민들을 위해서 사용하자고 결단하고 지금까지도 이것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사명이 없으면 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소중히 생각하지 않으면 할 수 없습니다.

오늘 사도바울이 어떻게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고 영광스럽게 생각하는지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도 구원하시고, 이스라엘도 구원하시어서, 하나님의 역사가 모두에게 이루어지리라.”는 것이 바울의 믿음이었습니다. 이 일을 위해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용하시라는 것을 정말로 기쁘게 여겼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바울의 마음을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우리의 마음은 어떠합니까? 하나님을 향하여 있는지 함께 생각해 보는 귀한 시간되시기 바랍니다.

13절입니다.

13.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여기에서 “직분”은 “봉사, 일”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바울의 일은 무엇입니까?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이 일에 대해 바울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좋다고 합니다. 자랑스럽다고 합니다.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되어 너무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보통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 자랑스러워하거나 행복해 합니까?

모든 일의 일꾼은 세 종류입니다. 첫째는 자신을 위하여 일하는 자,

둘째는 일을 위하여 일하는 자, 셋째는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는 자입니다.

그렇다면 정말 하나님을 위하여 일꾼된 자는 “나는 심부름을 받고 태어난 생명이다”라는 사명감을 느낍니다. 그런 사람을 두고 사명적 인간이라 합니다. 회사의 조그만 심부름꾼이 소사입니다.

몰래 보낸 심부름꾼이 밀사입니다. 하나님 심부름꾼이 천사입니다.

특별한 심부름꾼이 특사입니다. 급한 심부름꾼이 급사입니다. 임금의 심부름꾼이 칙사입니다.

공적 심부름꾼이 공사입니다. 심부름 받은 신하가 사신입니다. 심부름 받은 제자가 사도입니다.

심부름 받은 사람이 사자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사명이 무엇인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심부름입니다. 하나님 심부름꾼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떠한 심부름을 시키셨습니까?

14절입니다.

14. 이는 혹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하게 하여 그들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바울은 그 누군가가 누구인지, 어디에 살고 있는지, 몇 사람이 되는지 모르지만, 분명히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려고 작정하신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이방인에게 가서 복음을 전할 때, 이스라엘 가운데서 질투를 느끼고 하나님께 돌아올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바울의 이방인 전도는 자신을 매도하고 조롱하는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보복이나 버림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사랑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뒤 처음으로 그들을 전도현장에 내보내시면서, 마10:5-6절에 보면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오히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내 민족을 사랑하지 않으면, 내 민족을 위해 울어 보지 않으면, 내 민족을 위해 희생하지 않으면, 세계를 포용하는 세계인이 결코 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내 민족을 사랑할 때만 그 사랑으로 세계를 포용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은 애국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곁에 있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바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버리지 않고 반드시 구원하시리라 믿었기 때문에 이방인에게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방인들에게 전하는 사랑이 자기 민족에게로 되돌아오리라 믿었습니다.

그러한 바울의 믿음의 근거는 어디있습니까?

15~16절 말씀 보겠습니다.

15. 그들을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

16.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

주위 사람들은 아무도 믿지 않는데, 자기 혼자만 하나님을 믿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럴 때 절망에 빠지기 쉽고, 낙심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전혀 절망하고 낙담할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나의 가족 중에서 나를 구원해 주셨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구원이 내 가정에 임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나를 받아주셨는데, 내 남편, 내 아내, 내 부모, 내 형제를 왜 받아주시지 않겠습니까?

이 세상이 악하고 불의할수록 사람들은 더욱 절망합니다.

그런데 “나 같은 사람이 구원받았다.”는 사실은 “이미 하나님의 구원이 이 사회에 임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절망할 것이 없습니다.

내가 복음을 전하는 통로가 되면 “하나님께서 구원해주시리라.”는 것이 바로 바울의 믿음이었습니다. 바로 하나님을 기쁘시게만 하면 믿지 않는 우리의 사랑하는 영혼들, 가족들을 하나님께서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이제 갓 인수를 받은 젊은 목사가 어떤 교회로 부임하였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신임 목사를 환영하는 만찬회가 열렸는데 어떤 부인이 젊은 목회자에게 다가가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떻게 목사님께서는 7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의 요구를 만족 시켜 주어야 하는 힘든 일을 맡으실 생각을 하시게 됐는지 이해가 안 가는군요."

그러자 젊은 목사는 주저함 없이 대답하였다.

"제가 이 도시에 온 것은 7백 명의 사람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단 한 분만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하여 온 것입니다. 그 분이 기쁘시기만 하면 나머지 모든 것들은 저절로 잘될 것입니다.“

바울이 가지는 사명에 대한 자랑스러움과 행복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 주님을 기쁘게 하면 구원은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이므로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또 사도바울은 조상부터 내려온 하나님의 약속을 확실히 믿었습니다.

16절 하반절에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리라.”

이스라엘 백성은 뿌리가 무엇입니까?

의인인 노아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입니다.

여기서부터 이스라엘이라는 가지들이 무성하게 뻗어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가지 중에 어떤 가지는 이방인처럼 보였고, 어떤 가지는 이방인보다 더 못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 뿌리가 노아요, 아브라함인 이상, 그 가지는 이스라엘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당신의 백성을 구원해 주시리라.”고 믿은 것입니다. 철저히 하나님 입장에서 바울은 생각했습니다.

그럼, 우리는 신앙생활하면서 사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왔습니까?

하나님의 사명을 받은 사람은 '내가 무엇을 하고, 이걸 해서 하나님이 나한테 어떻게 해주고~‘라고 절대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심부름꾼은 주를 위해 죽고 주를 위해 사는 것입니다.

키에르 케고르가 코펜하겐 대학의 신학생 시절 그가 22세 되던 때에 일기를 이렇게 썼습니다.

“온 천하가 다 무너지더라도 내가 이것만은 꽉 붙들고 놓을 수가 없다.

내가 이것을 위해 살고 이것을 위해 죽을 수 있는 나의 사명을 발견해야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이것”은 무엇입니까?

“살아도 주를 위하여 죽어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나니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로다.” (롬 14:8) 바울의 고백입니다. 바울이 사명을 즐거이 감당하는 이유입니다. 바울이 주님 안에서 늘 기쁘게 사는 이유입니다.

오늘 사명을 영광스럽게 여겨 늘 행복하게 살았던 사도 바울처럼 우리 안에도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가 가득 넘쳐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은혜로우신 하나님!

주의 영광을 위해 살겠습니다. 주의 뜻을 따라 살겠습니다. 주가 부르신 어느 곳에 가서라도 있겠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사명 따라 살면서 주가 주시는 영적인 만나와 메추라기를 매일 먹기를 원합니다. 우리를 만드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돌보시고 우리를 축복하시는 하나님! 주님만 바라보고 가렵니다. 함께 하옵소서! 이 모든 말씀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