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호세아 6:1-3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설교: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정신병을 전문으로 치료하는 정신과 전문의사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이상하게도 정신병자들은 하나같이 모두가 잘났고, 똑똑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어느 정신병자가 "나는 하나님이다"라고 소리 질렀습니다. 그러니까 옆에 있던 정신병자가 "네가 어째서 하나님이냐?"하고 따집니다. 그랬더니 뒤에서 듣던 정신병자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언제 너를 하나님 하라고 했냐?" 저마다 잘난 것입니다. 정신병자는 자기 지식이 언제나 옳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들은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 지금 어떻게 믿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생각하고 있습니까? 우리 마음대로 생각하며, 하나님이라면 이런 하나님이여야 한다며 우리 스스로를 엉뚱한 상상 속에 가두어 놓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러면 참으로 큰 문제입니다.
이런 식이면 하나님께 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살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참으로 보면, 황당할 정도로 하나님 앞에서 당당하고 교만합니다.
창세기 3장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범죄한 아담이 에덴 동산에 숨어 있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찾아와 이같이 “네가 어디 있느냐?” 그 때 아담이 이와 같이 대답합니다.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습니다.” 어디 있니? 나 숨었다. 이게 무슨 대답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상태를 묻고 계신데 나 숨었다고 대답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신 대답은 무엇입니까? “내가 죄를 지었습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이 대답을 듣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엉뚱하게도 ‘내가 여기 숨었나이다’
이것으로 끝입니다. 여기에는 구원의 길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 용서받을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복 받을 길이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분들이 제일 기분 나빠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우리 모두는 죄인입니다.
다 많이 알고 다 나름대로 똑똑하다고들 생각합니다. ‘내가 잘못했습니다. 내가 죄인입니다.’라고 말하는 분이 전혀 없지 않습니까? 이렇게 되니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들려지는 것도 없습니다. 꽉 막혀 버리는 것입니다.
호세아 4:6은 말씀합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아는 게 없어서 망하는 겁니다. 알고 보면 모든 일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너무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이 없어서 호세아 선지자를 부르셨습니다. 좋은 집안, 훌륭한 신앙을 가진 호세아에게 음란한 여인과 결혼하라고 하셨습니다. 왜요? 우리가 생각해봐도 정말 이상한 일입니다. 호세아는 선지자입니다. 선지자의 가정이 하나님 앞에서 사람들 앞에서 바르게 있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만 바라본 선지자 호세아는 음란한 여인 고멜과 결혼했습니다. 선지자와 결혼한 고멜이 변화되었을까요? 옛 음란했던 인생을 버렸을까요? 아닙니다. 처음엔 잘 사는 것처럼 하더니 아이들을 낳고서는 다시 집을 나가 다른 남자들과 바람을 피며 놀러다녔습니다.
첫째 아들의 이름은 ‘이스르엘’입니다. 이 이름은 별로 좋은 이름이 아닙니다. 이 이스르엘은 하나님의 진노가 임했던 무서운 전쟁터였습니다.
둘째 딸의 이름은 ‘로루하마’입니다. 로루하마라는 뜻은 ‘너는 사랑받지 못하는 여자’라는 뜻입니다. 아마 호세아의 딸은 굉장한 쓴 뿌리가 있었을 것입니다. 이름이 사랑받지 못하는 여자라는 뜻이니까, 사람들이 ‘로루하마 로루하마’… 라고 부를 때마다 얼마나 괴로웠을까요?
셋째 아들의 이름은 ‘로암미’인데... 그 뜻은 "너는 내 백성이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호세아의 아들과 딸들은 이름부터가 저주였습니다.
그런데 더 충격적인 사실은 호세아의 세 자녀들은 호세아의 자식들이 아니었습니다. 그 아이들을 낳고 보니까 호세아와 전혀 닮지를 않았습니다. 자기와는 전혀 닮지 않은 자식들의 모습을 보면서 호세아의 마음은 찢어지는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정말, 이 여자 고멜은 어쩔수가 없는 여인이었습니다. 호세아와 결혼한 고멜이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는 아이를 낳았을 때 하나님은 그 아이들의 이름을 이스르엘, 로루하마, 로암미라고 지어주셨습니다.
그런데 이런 생활을 하고 완전히 바닥까지 내려간 고멜을 호세아는 은 열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반을 치르고 고멜을 사옵니다. 당시 노예 한 사람의 값은 은 30개 였으니, 어쩌면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탈탈 털어 고멜을 저 인생 밑바닥에서 구해 낸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호세아를 통해 끝까지 우상 가짜신 바알에게 넘어가 인생 막장으로 흘러가는 이스라엘을 구하시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함을 이스라엘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아무리 하나님을 떠났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 돌아오기만 하면 용서하시겠다는 끝이 없는 사랑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용서 받을 수 없는 죄라도 하나님께 돌아온다면 용서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아버지를 떠난 탕자와 같이 모든 재산을 다 허비하고 허랑방탕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다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올 때 아버지는 달려가서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자신의 아들로 다시 받아 들였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이 사랑을 이스라엘에게 보여 주시기 원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사랑의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몰랐습니다. 자신의 생각대로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호세아는 말합니다! 1절입니다.
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
호세아 선지자 당시, 이스라엘은 이웃 나라 앗수르의 침공을 받아 아주 어려움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왜 이런 어려움이 왔을까 자신들이 생각할 때 하나님을 떠나서 이렇게 된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눈에 보이는 강대국 이집트나 앗수르를 의지하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생각에는 그 방법이 맞는 것 같습니다.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어렵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방법이 딱 보기에 맞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온전하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해야 합니다.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따라가야 합니다. 우선 보기에는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을 믿고 나아갈 때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길이 있습니다.
이어서 오직 하나님께만 우리가 살 길이 있음을 호세아 선지자는 말합니다. 2절입니다.
2.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무슨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이 죽어도 다시 살리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산다는 것입니다. 이 구절이 누구를 생각나게 하십니까?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의 죄를 위해 죄없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삼일 만에 살아나셨습니다. 죽음을 이기셨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지금도 하나님 오른 쪽에 앉아서 죄많은 우리들 편에서 변호하고 계시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는 사람들에게 많은 능력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죽는 그 순간이 와도 삽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또 일으키시기 때문입니다.
1967년 6일 전쟁 때 이스라엘 군인 20명이 이집트 군대 3개 사단을 물리친 적이 있습니다. 이집트군이 손을 들고 항복하고 나왔습니다. 왜 그런가 알아보니 이집트 군대가 이스라엘군과 싸우는데 엄청난 군대가 이스라엘 군대와 같이 싸우고 덤벼드는 모습을 바라보았습니다. 도저히 안된다고 생각해서 손을 들고 항복하고 나왔습니다. 나와서 보니까 이스라엘 병사가 20명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집트군의 눈에 하나님의 군대을 보여주어서 그래서 안되겠다. 생각하고 손들고 나왔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지킬 때 이와 같은 방법으로 지킬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 23장 10절에는 “너희 중 한 사람이 천명을 쫓으리니” 했는데 그렇게 지켜 주실 것이라고 약속해 주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셔서 우리를 이렇게 지켜주실 줄 믿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호세아는 더 분명히 말합니다.
3절입니다.
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여호와를 안다는 단어는 ‘다아트’인데 이 말은 ‘야다’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야다’는 체험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우리의 지식은 추상적, 그러니까 그냥 생각하거나 들어서 아는 지식이 있고, 직접 해봐서 아는 경험적 지식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많이 압니다. 하나님의 주변적 이야기에 대해서 많이 압니다. 그러나 하나님 자신을 모릅니다. 우리는 경험 한만큼 알게 됩니다. 관심이 있는 만큼 알게 됩니다. 사랑 한만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을 아는 것만 해도 엄청난 축복이 있습니다. 이론적으로만 아닙니다. 실제적인 역사입니다. 힘써 여호와를 아는 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자들에게 주시는 약속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이 나타나십니다. 새벽의 빛은 반드시 옵니다. 아무리 밤이 캄캄하다고 할지라도 새벽이 되면 동이 터옵니다. 하나님을 힘써 아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반드시 찾아오신다는 약속입니다. 아무리 어두워도 새벽이 오지 않는 날은 없습니다. 반드시 옵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반드시 만나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이스라엘의 현재의 상황이 아무리 어렵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찾으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만나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약속은 우리의 마음을 얼마나 평안하게 하는지 모릅니다. 이 땅에서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만나서 곤고한 중에 있을지라도 하나님을 찾는 자는 하나님께서 지체하지 않으시고 반드시 만나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야기 하나를 소개하면서 말씀을 마치고자 합니다.
어떤 목사님께서 덕산에 휴가를 갔었답니다. 가족 중에는 여섯 살 미만의 어린아이가 네 명 있었는데 함께 물놀이를 하던 중 아이 하나를 잃었습니다. 아이를 찾아 나섰으나 워낙 많은 사람이 붐빈지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 막막해진 목사님 부부는 조용히 눈을 감고 “주여! 잃은 아이를 찾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곧이어 안내 방송이 들렸다. “다섯 살 난 최예림 여자 아이를 보호하고 있습니다.” 급히 달려가 아이를 찾게 되었습니다. 보니 길 잃고 우는 아이를 안전요원이 발견하고 사무실로 데려간 뒤 어린 아이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 아빠와 엄마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똑바로 아빠와 엄마의 이름을 알고, 또 자기 이름도 똑바로 이야기 하니까 찾을 수 있었습니다. 안내방송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누구에게 속해있습니까? 하나님께 속해 있습니다. 하나님께 속해있는 사람은 하나님께 있어야 합니다. 만약에 하나님과 함께 있지 않고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다면, 자기가 누군지도 모른채,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른채 그러고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오늘 하나님께서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 분명히 말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1)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회개입니다. 회개는 장소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를 바꾸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하나님이 내게 원하시는 삶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나는 나라는 식으로 살았는데 이제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본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2)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3)라고 했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 꼭 잊지마시고 하나님의 품 안에 사시는 놀라운 축복 있으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은혜로우신 하나님~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살면서 하나님을 결코 떠나지 않기를 원합니다. 주님 없이는 살 수 없사오니 늘 주 안에서 주의 사랑 가운데 살기를 원합니다. 붙들어 주옵시고 주님의 말씀대로 살게 하옵소서~ 이 모든 말씀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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