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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위로의 하나님 (고후 1장 3~5 주일예배 20180114)

by 온누리선교 2018. 1. 11.

성경본문: 고린도후서 1: 3~5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설교: 모든 위로의 하나님

 

부드럽고 감상적인 저음의 목소리와 낭만적인 곡들로 전 세계적으로 1980년대까지 1억만 장 이상의 앨범 판매고를 올린 음악인이 있습니다. 이 분은 스페인의 가수 훌리오 이글레시아스입니다. 그는 원래 장래가 누구보다 밝은 축구선구였습니다. 그런데 교통사고를 당해서 심각한 부상을 입었습니다. 단 한 번의 사고 때문에 모든 것이 한 순간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더 이상 축구화를 신고 동료들과 함께 푸른 잔디를 마음껏 내달릴 수 없었습니다. 그는 절망한 채 병상에 누워 있었습니다. 누구도 그를 위로할 수 없다고 주변 사람들은 생각했습니다. 역시 어떤 말에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한창 뻗어 나가야 할 시기에 꺾여 버린 자신의 꿈은 그 무엇으로도 보상이 될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때 한 간호사가 그를 위로하기 위해서 기타를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는 간호사가 건네는 기타를 받아 들었고, 이날부터 그는 전혀 새로운 길에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예상치 못한 부상 때문에 축구 영웅이 되는 꿈을 접어야 했던 이 젊은이는 대신에 아름다운 음성으로 전 세계 사람들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리고 이글레시아스의 노래를 들은 사람들은 그의 아픔을 담아낸 위로의 목소리로 어떤 상황에서든 참으로 큰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주님은 자신의 자녀들이 아파서 고통 당할 때 결코 그냥 두지 않으십니다. 그 아픔을 도리어, 그 환난을 도리어 더 큰 축복으로 바꾸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 환난 가운데에서도 그냥 두지 않으시고 참 위로를 주시는 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시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을 진정으로 만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하나님의 위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사랑을 넘치도록 받으시는 귀한 시간 되시기를 바랍니다.

3절의 말씀입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3절의 말씀을 잘 살펴보면, 여기서 자비라는 말이 킹제임스버전 영어 성경에는 “mercies", 복수로 되어 있고, 위로 앞에도 모든이라는 단어가 붙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경험하는 온갖 사건, 상황들에서 자비들을 베푸시고 이 모든 일에 위로자가 되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어떠한 어려움가운데에서도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아낌없는 위로를 주시며, 또 우리를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통이 너무나도 커서 왜 이런 자비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고통 가운데 처하게 하고, 왜 우리를 고난 가운데에서 구해주지 않느냐고 질문하시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아무리 성경을 보아도 뚜렷한 답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이 이해하기에 뚜렷한 답이 없습니다.

사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노라면 여러 가지 일들로 인해 많은 상처를 받게 됩니다. 오해로 인한 갈등, 가정생활에서 오는 갈등, 사업의 어려움, 육체의 질병, 사람사이에 생긴 상처 등 가지가지 일들로 괴로움과 좌절과 탄식 속에서 몸부림을 치기도합니다.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이 모든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도리어 그리스도인이 되었기에 당하지도 않을 고난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필요한 것이 마음의 위로입니다. 위로란 괴로움을 어루만져 잊게 하고 마음을 즐겁게 해주는 것을 말합니다. 힘든 상황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위로 받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사람의 입에 발린 위로는 갈증을 풀기에 부족합니다. 진정한 위로는 하나님께로부터 오지만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붙잡고 사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4~5절의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옛날 영국 빅토리아 여왕시절에 자녀를 기다리다 유산을 한 신하의 아내가 있었는데 그후 삶의 의욕을 상실하고 죽음을 생각한다는 소식을 듣고 여왕이 친히 그녀를 방문한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여왕의 방문이후 이 여인은 놀랍게 회복되어 삶의 페이스를 되찾았다고 합니다. 도대체 여왕이 찾아와 무슨 말을 해 주었느냐고 묻자 이 여인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여왕은 제 손을 잡고 꼭 한마디 말을 하셨습니다. ‘당신의 마음이 어떤지 내가 알아요그 말이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저는 여왕폐하께서 얼마 전에 나처럼 유산한 것을 기억해 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여왕께서 나 같은 여인까지 찾아온 이유임을 깨달았습니다. 제가 그분의 손을 잡고 있는 순간 이 고난이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이상하게 제 가슴을 죄고 있던 고통이 저에게서 떠나갔답니다.” 이것이 바로 위로의 능력인 것입니다. 위로를 영어로 comfort라고 하는데 이 말은 com(함께)라는 말과 fort(나전어의 fortare)힘을 돋운다는 뜻이 합쳐진 단어입니다. “고통받는 사람들이 함께 하는 자리그 곳은 고난을 이기는 새 힘을 공급받는 능력의 자리요 치유의 자리인 것입니다.

이렇게 위로라는 것은 같은 입장에서 같이 아파하고 같이 고통 받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로하시는 주 예수님은 결코 말로만 위로하시는 것이 아니라 같은 처지에서 몸으로 함께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마구간에서 태어나신 것은 가난한 이들과 사랑 없는 세상에서 무시 받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의 위로자가 되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시자마자 이집트로 피난가신 것은 난민들의 위로 자가 되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난한 목수 가정에서 땀 흘려 일하신 것은 노동자의 위로 자가 되시기 위함입니다. 성경은 어디에도 예수님이 학교에서 배우셨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이는 배우지 못한 분들의 위로 자가 되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믿었던 제자 가룟 유다에게 배신을 당하여 은 30에 팔리신 것은 인간관계에서 배신당해 괴로워하는 이들의 위로 자가 되시기 위함입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은 인류의 구원과 함께 억울한 자들의 위로 자가 되시기 위함입니다. 비록 가난하고 배우지 못해 천대받으며 살아도, 배신을 당하고, 온갖 억울한 일을 당해도, 묵묵히 하나님을 섬기며 순종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승리하게 하신다는 것을 예수님은 친히 보여주셨습니다.

이 땅에서 예수님 보다 더 가난한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 땅에서 예수님 보다 더 실패한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 땅에서 예수님 보다 더 큰 수치를 당한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 땅에서 예수님 보다 더 억울한 일을 당한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본문 5절에 말씀하시기를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위로하시되 넘치는 풍성한 위로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단 하나뿐인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은 인간의 상처를 위로하시기 위해서였다고 오늘 성경말씀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확실하고도 그 누구도 해줄 수 없는 위로를 우리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해주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위로의 하나님을 바라보기에 하나님을 붙잡고 살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래서 하나님께서 모든 환란 중에 있는 우리를 위로하신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렇습니다. 위로 받지 못한 사람은 위로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참된 위로는 그런 위로를 경험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난을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고난당하는 사람을 참으로 위로할 수 없고, 환란을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환란 당하는 사람들을 진정으로 위로할 수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바울은 위로자의 조건을 제대로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야말로 엄청난 환란과 엄청난 위로를 함께 체험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도 바울이 겪은 고난을 통하여 위로라는 선물을 맺게 해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고난 가운데 있게 하신 이유는 같은 고난을 받고 있는 이들의 위로자가 되라는 메시지입니다. 유명한 신학자 헨리 나우엔은 이런 우리의 소명을 일러 상처받은 치유자”(wounded healer)라고 했습니다. 상처받아봤기에, 고난 받아봤기에, 그와 비슷하거나 똑같은 고통을 경험해본 사람이 잘 알고, 또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넘치게 받고 주님의 위로를 경험해본 사람이 진정 주님의 이름으로 그런 고통에 있는 사람을 도와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는 것을 종종 발견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고 잡히지 않아도 말입니다.

한번은 극동방송이라는 기독교방송을 차를 타고 오면서 이야기 하나를 들었습니다. 거기서 짧은 어느 한 여자 집사님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이 분은 어느 날 갑자기 암이 발견되었습니다. 그 치료과정이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웠습니다. 그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돈 문제가 생겨서 집이 어려워졌습니다. 병들지 않고 건강할 때는 아무 문제도 없던 이 분이 갑자기 병이 생기니까 안 생기던 문제들이 마구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몸이 아픈데 세상적으로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기니 너무나 고통스러웠습니다. 세상이 자기를 버린 것 같고, 가족들도 친구들도 위로를 해준다고 하지만 하도 그 기간이 오래되니 자신을 피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내 고통을 누구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서 너무 외롭게 힘들어하고 있었습니다. 그 외로움과 고통이 심해지자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날 집에서 누워있는데..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 난 너무나 위로가 필요해요. 너무나 외롭고, 힘들어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어요. 날 위로해주세요.. ”라고 저절로 기도가 나오더랍니다. 제대로 무릎 끓고 손 모으고 기도할 힘도 없어 그냥 누워서 그렇게 기도가 나오더랍니다. 그리고 누워서 잠들려고, 그냥 무심코 라디오를 틀었는데, 트는 순간, 어떤 성우가 성경구절 고린도 전서 13절 이하의 말씀을 읽더랍니다. “위로의 하나님, 우리를 위로하시는 하나님” 3~7절까지 5절 가운데 위로라는 단어가 심지어 9번이나 나오는 것을 보면서 이 분은 너무 소름끼치면서 갑자기 마음 안에 따뜻함이 올라오더랍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돌봐주시는 구나...이렇게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지켜보고 계시는 구나.. 나를 위로하면서 함께 계시는구나.” 라고 고백할 수 없었습니다. 정말로 신기하게도, 하필이면 어떻게 그 때 그런 말씀이 나올 수 있을까요?

지금 이 순간 여러 가지 문제들로, 그 누구도 도와줄 수 없는 상황 가운데 있는 분들이 계십니까? 오늘 이러신 분이 계시다면 이 여자집사님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 마음을 위로하신 하나님을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고, 우리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시는 하나님을 만나셔서 진정한 위로를 받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사랑과 위로의 하나님! 우리가 주님의 위로가운데 힘을 얻습니다. 예수님께선 우리의 고난보다 더 힘든 고난을 당하시고, 우리가 지금 얼마나 힘들어하는지 고통스러워하는지 그 누구보다 아시는 것을 압니다. 우리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심에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내일도 함께 하시고 우리가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위로하시고 힘주시는 주님을 보며 살아가겠사오니, 우리가 우리와 같은 고난을 당하는 자에게 주님의 말씀과 위로를 전하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이 모든 말씀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