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고린도전서 11:17~22
17. 내가 명하는 이 일에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너희의 모임이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
18. 먼저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 함을 듣고 어느 정도 믿거니와
19. 너희 중에 파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
20.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21.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사람은 시장하고 어떤 사람은 취함이라
22.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
설교: 교회를 업신 여기지 말라
어떤 목사님이 성도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 5가지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첫째, 개인주의자로 교회의 공동생활을 싫어하는 경우
둘째, 방랑자로 신앙의 뿌리를 한 교회에 내리지 못하는 경우
셋째, 쾌락주의 자로 자기에게 만족할 프로그램이 있을 때는 열심히 나오지만 자기에게 즐거움과 만족을 주지 못할 때는 교회를 떠납니다.
넷째, 교만한 자로 자기의 주장이 교회에서 인정을 받지 못할 때 신앙 공동체에 적응을 못하고 떠납니다.
마지막으로 교회에 나와도 진지한 신앙생활을 못하고 신앙 중심이 흔들리는 사람이 교회를 떠납니다.
교회를 어떤 이유로서든 떠나는 사람들의 공통된 점은 예수님을 자기 생활의 중심에 모시고 산 사람들이 아니라 무대 위의 구경거리로 여기고 교회를 다닌 사람들이라는 점입니다.
고린도 교회에서도 이러한 문제가 나타났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욕을 먹기도 합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이러한 안타까운 모습에 어떻게 교회를 대하여야 하는지 알려주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듣고 더욱 더 굳건한 믿음으로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17~19절의 말씀입니다.
17. 내가 명하는 이 일에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너희의 모임이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
18. 먼저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 함을 듣고 어느 정도 믿거니와
19. 너희 중에 파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지적한 것은 “분쟁과 파당”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고 하나님 한 분을 섬기기 위해 한 마음이 되어야 했지만 고린도교회에서는 서로가 싸웠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분열을 듣고 그럴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왜냐하면 고린도교회 안에 이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싸울 뿐만 아니라 당파를 짓고 신앙의 터를 파괴하는 마음으로 교회를 분열시키고 있었습니다. 믿음과 양심을 파괴하면 사랑이 금가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런 일이 반드시 오게 마련입니다.
미국 종교 월간지 [무디] 2월호는 [교회가 분열될 수 있는 10가지 지름길]이란 제목의 흥미로운 기사를 실었습니다. 이 기사에서 [무디]는 교회를 분열시키는 요소를 열거함으로써 역으로 교회가 분열을 막을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다음은 [무디]가 제시한 교회를 분열시키는 10가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1) 교회 내 특정 개인의 요구사항에만 철저하게 초점을 맞춰라.
2) 교회 안에 떠도는 모든 소문과 비평을 다 귀담아 들어라.
3) 목회자의 약점만 찾아내 이야기하라.
4) 사랑 안에서 결코 참된 것을 말하지 말라.
5) 불평불만의 씨를 마음 속 깊이 간직해두라.
6) 남을 용서하되 오직 스스로 잘못을 시인하는 자만 용서하라.
7) 자신의 죄는 덮어두고 위선으로 가장하라.
8) 공중기도 시간을 통해 교회에 대한 불만을 다 토해내라.
9)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항상 이기기에 힘써라.
10) 하나님이 당신에게 [교회를 분열시키라]는 사명을 주셨다고 믿고 행하라.
역으로 생각해보면, 이런 교회를 분열시키려고 유혹하는 이단이나 사단의 꾀임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하나님의 진리를 지키려는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께 인정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시작은 미약하나 끝은 창대’하게 만드시는 분이시기에 우리가 눈 앞의 것만 바라보지 말고 저 천국과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하여 하루하루를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는 어떠했습니까?
20~22절입니다.
20.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21.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사람은 시장하고 어떤 사람은 취함이라
22.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
초대교회의 예배는 보통 가정집이나 정해놓은 비밀한 장소에서 드려졌습니다. 그래서 예배드리러 성도들이 모일 때 정해진 시간이 있지만 그 전에 모여 먼저 자연스럽게 교제가 이루어지게 되었고, 그 교제를 위해서 성도들은 각자 자기 집에서 음식을 준비하여 성도들과 함께 나눠먹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식사를 겸한 교제가 끝나면 자연스럽게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순서로 들어가게 되었고, 또 그 예배를 드리면서 성찬예식을 거행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 안에 있는 부자들이 맛있고 비싼 음식을 준비해와 보란 듯이 펼쳐놓고 다른 사람들을 상관하지 않고 자기들끼리 먼저 음식을 꺼내놓고 먹었던 것입니다. 자기들이 준비한 음식이니까 자기들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몰지각한 의식입니다. 내 가 가져온 것이지만, 교회를 위해서 여러 성도들과 교제하며 하나 되기 위해서 가져온 것이기 때문에 내가 마음대로 처리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교회 전체에 그것들을 골고루 나누고 함께 먹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의 부자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들은 교회 안에서 유력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며 자기들끼리 모여서 자기들이 가져온 음식을 먹고 마셨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가난한 성도들은 끼기가 어려웠습니다. 가난한 성도들은 음식인들 제대로 가져오겠습니까? 빈손으로 오기 일쑤고 뭐라도 좀 가져온다고 하면 그 자리에 내놓기 부끄러운 보잘 것 없는 음식을 가져오는 정도였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자들은 다른 가난한 성도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들을 배려해야 했지만 오히려 거들먹거리며 가난한 성도들을 소외시키는 일들을 행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런 식의 성찬은 '자기의 만찬'은 될지 몰라도, '주의 만찬'이 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일반적인 만찬이라면 당시 풍습대로 상류층과 하류층을 구분할 수도 있겠지만, 주의 만찬은 달라야 했습니다. 부유한 성도들이 각자 자기 집에서 마음껏 먹고 마시는 것은 상관이 없지만(22a), 성찬을 포함하는 공동 식사 자리만큼은 음식을 평등하게 나눔으로써, 서로가 주 안에서 하나 되었음을 표현했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들의 행위는 하나님의 집인 교회를 경멸한 것이었습니다. 이들이 만약 잔치를 배설하려면 가정에서 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의 만찬에 나와서 음모와 싸움을 하여 가난한 사람을 무시하고 규례를 어기고 교회의 가난한 사람을 무시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큰 죄를 짓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부자나 가난한 자나 다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영혼이었는데, 감히 하나님도 귀하게 여기시는 가난한 사람의 영혼을 업신여기고 무시하는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우습게 여기고 그리스도의 핏값으로 산 귀한 영혼들을 실망시켰기 때문입니다.
교회란 어떤 곳입니까?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입니다.
하나의 교회는 하나의 예배가 있으며, 이 하나의 예배 속에서 예배하는 자들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같이 함께 예배 속에서 하나님을 만난 성도들은 하나님을 만난 그 감격으로, 그리고 같은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성도들은 그 하나님의 말씀으로 서로 교제를 나누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분열하였고, 파당이 있었고, 또 성만찬 가운데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차별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만날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저 말씀을 듣는 구나, 그저 찬양을 하는 구나, 겉핥기식으로 하나님을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니, 고린도교회 안에서 성도 간의 교재도 없고, 교통함도 없는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핏값으로 세워진 곳이고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되시고 우리는 팔 다리 등등 그 분의 지체가 됩니다. 그런데 지금 고린도교회는 따로따로 놀고 있습니다. 그러니 생명이 있겠습니까? 영적인 생명이 없으니 죽은 거와 같고 제대로 움직이고 활동할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교회가 교회같지 않게, 교회에 모였지만 교회에 있는 것이 아니고 세상에서 사는 것처럼 사는 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바울은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22절입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맞는 말입니다. 감히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는 행동을 하고도 하나님의 자녀된 가난한 자들을 실족하게 만들어놓고도 뻔뻔하게 나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도 않으니, 참으로 사도 바울이 딱 맞는 말을 한 것입니다. 교회는 무시당하지도 업신여김을 받지도 않을 놀라운 거룩한 능력이 있는 곳인데도 말입니다.
소련의 모스크바에 있는 붉은 광장 옆에는 옛날 제정 러시아 시대에 건축된 웅장한 러시아 정교회의 성전이 서 있습니다. 둥근 양파처럼 생긴 돔(dome) 형식의 지붕 위에는 아직도 십자가가 서 있습니다. 현재 소련의 공산주의 체제 밑에서는 성경책을 절대 사 볼 수 없고 전도지 한 장조차 나누어 줄 수 없지만, 수많은 소련 시민들은 공산주의를 아무리 신봉해도 참된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붉은 광장 옆에 있는 그 예배당에 모여 들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수백 년 전에 자기들의 조상들이 신앙의 힘과 노력으로 이룩한 높은 성전을 볼 때마다, 소련 시민들은 그 성전 건물이 전해주는 신앙의 유산을 새롭게 발견하고 그리스도를 믿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미 성전 건물 자체가 전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거룩한 성도이지만 교회 안에서 어떻게 믿음생활하고 있는지를 말입니다. 세상의 것이 아닌 하나님의 것으로 살아가는 일을 절대로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포기하는 그 순간 우리는 교회를 업신여기는 짓을 하게 되고 하나님 앞에서 커다란 죄를 짓는 것임을 꼭 기억하시고 믿음의 길로, 거룩의 길로 나아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우리가 주님의 집을 더럽히거나 업신여기겼던 행동이나 말을 했다면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를 거룩한 주님의 말씀으로 가르치시고 성령으로 충만케 하셔서 주님의 자녀로 사는데 부족함이 없도록 하옵소서! 세상의 유혹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주님의 나라에서 사는 기쁨을 누리게 하옵소서! 이 모든 말씀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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