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온누리선교교회/한국어예배

고린도후서 강해 1) 고난과 위로의 하나님 (수요예배 20190501)

by 온누리선교 2019. 4. 30.


 

성경본문: 고린도후서 1:1~7

 

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3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4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5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6 우리가 환난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혹 위로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7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설교: 고난과 위로의 하나님

 

어린 소년이 연못가에서 손으로 만든 작은 종이배를 띄우며 놀고 있었는데 배가 손에 닿을 수 없는 곳으로 밀려나자 소년이 울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을 본 소년의 형이 배가 나가는 방향에 돌을 던졌습니다. 그러나 어린 소년은 더 소리 내 울었습니다. 왜냐하면, 형이 던지는 돌맹이가 배를 맞추어 가라안제 하려는 것이 아닌가 해서 운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던진 돌맹이 때문에 서서히 물에 물결이 생겨 배가 뭍으로 점점 움직여 왔던 것이었습니다.

우리 대부분도 어린 소년과 같이 고난의 물결을 일으키는 돌맹이가 앞에 떨어지면 당황하고 울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 주시려 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의 고난을 승리로 바꾸어주시며 더 넓고 더 크게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는 눈을 열어주시고 자라나게 해주십니다.

 

오늘 여러 문제와 고난 중에 있는 고린도 교회에게 사도 바울은 위로의 말을 전합니다. 그 말 하나 하나가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커다란 하나님의 위로가 됩니다. 주님 주신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넓은 사랑과 참된 위로를 얻으시길 바랍니다.

 

3~4절의 말씀입니다.

3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4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사도 바울은 참으로 힘있게 고난 중에 있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위로를 받는다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확신 있게 자신감 있게 말할 수 있을까요?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고 이방인의 사도로 쓰임 받아 살면서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환란과 고통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성품을 발견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자비의 하나님이십니다. 헬라어 원문에 보면 자비 앞에는 정관사가 붙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바로 그 자비 곧 자비 그 자체가 되신다는 말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모든 위로 곧 온전한 위로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여기서 위로란 어려움을 당할 때 이에 맞서 승리할 수 있도록 옆에서 돕고 격려하는 힘을 말합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위로는 자신의 문제를 극복할 정도의 힘을 주는 것이 아니며 환난 중에 있는 모든 자들을 능히 위로할 수 있을 정도로 차고 넘치는 위로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크고 작은 고통의 순간들이 많고 많은 고난과 환란 가운데 있게 됩니다. 그럴 때 사람들은 이 고난을 어떻게 해야하는가 고민에 빠집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요나선지자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됩니다.

 

요나가 당한 고난은 단 3일간의 고난이었지만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어찌보면 지옥까지 내려간 고난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요나에게 예고된 풍량, 물고기 뱃속에서의 사투 등 생명과 죽음을 왔다갔다하며 혼신을 다해 기도하는 요나에게는 정말로 엄청난 고난이었습니다. 어떤 도움도 기다릴 수 없는 완전히 바닥을 치는 상황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요나는 이러한 절망 속에서 마침내 구원을 받고 하나님께서 명하신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됩니다.

어떻게 그 절망과 고난의 상황에서 나왔을까요?

첫째, 요나는 자신에게 고난을 허락하신 하나님에게 기도했습니다. 왜냐하면, 고난을 주신 하나님께서 축복도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이 고난을 바꾸어주실 분도 오직 '그 하나님'이심을 굳게 믿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가 깨닫는 만큼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자포자기나 원망은 내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또한 요나는 그런 엄청난 고난 중에서도 자기의 기도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확신하고 감사했습니다. 그래서 요나의 기도는 점점 깊어졌습니다. 처음에 요나는 "여호와를 불러 아뢰었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지금 그의 고난을 다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변화된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점점 더 죽음의 고통이 요나를 괴롭혔습니다. 그래도 낙심하지 않고 계속 부르짖으며 기도했습니다. 지금 처한 현실이 지옥과 같은 고통이라고 말하면서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다"라고 했습니다. 스올은 죽은 사람들이 머무는 곳을 말합니다. 물고기 뱃속에서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며 고통스럽게 부르짖으며 기도했습니다. 극심한 고통 속에서 정신이 점점 없어질 때쯤에도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삽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이렇게 고난 중에 있을 때 우리의 모든 관심과 생각을 온전히 하나님께 향해보십시오. 주 우리 하나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위로와 평화가 넘쳐날 것입니다. 스올의 배 속에 있는 요나였지만 그의 영혼에 비로소 평안이 찾아들었습니다.

완전한 절망을 놀라운 축복으로 바꾼 요나와 같이, 그 고난 가운데에서도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위로를 받은 사도 바울같이 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5~7절 이어서 보겠습니다.

5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6 우리가 환난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혹 위로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7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고난과 위로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며 이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위로도 넘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는 고린도 성도들을 향해 너희가 고난에 참여한 것같이 위로에도 참여할 줄을 확신한다고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3-10절 사이를 살펴보면 고난, 고생, 사형선고, 큰 사망 등 환난을 나타내는 단어가 10번 나오며, ‘위로역시 10번이 나오고 있습니다. 환난과 위로는 개인에게 있어서 이처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뿐 아니라 바울은 자신의 예를 들어 개인의 고난과 위로가 신앙공동체에도 상관이 있음을 말합니다. 그는 고난과 위로에 참여한다는 표현을 신앙 공동체의 교제를 나타내는 헬라어인 코이노니아”(κοινωνία)를 일부러 사용해서 그 뜻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신앙적으로도 이 말을 한 것은 이미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고난과 위로는 결코 개인만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매일 매일 고난 속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 우리가 위로를 받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핏값으로 산 교회 안에서 만난 서로서로 하나님께서 만나게 하시고 하나님의 위로를 이 믿음의 형제자매를 통해 받게 하시고 계시다는 말입니다.

 

아프리카의 쿤타리카라는 깊은 산에는 300여 종류의 원숭이들이 살고 있는데 영국의 리즈버리 탐험대가 그곳에서 이상한 현상 세 가지를 발견했습니다.

첫째는 어느 날 아침, 온 산이 떠나갈 듯이 원숭이들이 고함을 질러대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지도자격인 원숭이가 세상을 떠났기에 슬퍼하는 표시였습니다.

둘째는, 부부 원숭이가 서로 얼굴을 쓰다듬어 주며 눈물을 닦아주는 모습이었습니다. 작은 새끼가 죽었는데 서로의 슬픔을 위로해주는 것이었습니다.

셋째는 원숭이 한 마리가 커다란 구렁이에 칭칭 감겨 죽어가고 있는데 수십 마리의 원숭이가 돌을 던지면서 그 구렁이와 대항하여 싸우는 것입니다. 원체 커다란 구렁이라 잡은 원숭이를 다 잡아 삼키자 모든 원숭이가 나무에 거꾸로 매달려서 슬프게 울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 후 영국의 리즈벨리 탐험대는 다른 사람의 슬픔이나 어려움에 참여할 줄 모르고 자기만을 위하여 사는 사람들을 볼 때 아프리카의 쿤타리카 산 속으로 보내자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이 사회에는 위로받아야 할 사람들이 많습니다. 가난해서 끼니를 거르는 사람에게 끼니 한 번 대접한다면 그것이 가장 큰 사랑이며, 병든 사람을 찾아가 용기를 주며 하나님께 기도해주는 그 사람이야말로 위로자요 사랑의 실천자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위로해주는 사람이 되어야만 합니다. 위로해주는 일은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꽃이요 신앙고백을 실천하는 행동입니다.

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40;1)

 

그러므로 우리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절절하게 고난과 위로의 하나님을 전했던 사도 바울처럼 하나님의 깊은 뜻을 알아 그 주신 사명을 감당하고 서로서로 하나님의 쓰임받는 복된 일꾼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고난과 위로의 하나님을 이 세상 끝까지 전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고통 가운데 낙심할 때 조용히 찾아오셔서 위로해주시는 주님,

내 힘과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주님께 맡기게 하소서. 의인의 길에 약속된 것들을 바라보며 낙망하지 않고 세상의 유혹을 이기게 하소서. 우리 가정과 교회가 위로의 터, 격려의 터, 축복의 터가 되게 하옵소서. 지금 당장 힘들지라도 정직하게 살아갈 용기를 주시고 끝까지 십자가상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본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게 하옵소서!

이 모든 말씀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