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히브리서 12장14~17
14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15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며
16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
17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설교 : 주님의 화평과 거룩으로 사는 법
이 세상에서 가장 순결한 것은 '빛'과 '바다'와 '소금'입니다. 특히 그 중에서도 소금이 가장 순결한 것으로 인정을 받는데 왜냐하면 순수한 빛과 순수한 바다가 합쳐져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소금처럼 순결하라' 고 하시지 않고 '비둘기처럼 순결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소금 대신 '비둘기'를 말씀하셨을까요?
'비둘기'로 사용된 단어는 '페리스테라'인데 '집비둘기'를 가리킵니다. 집비둘기는 주인에게 아주 충성스럽습니다. 그래서 편지나 전화가 발달하지 않았던 옛날에, 이 집비둘기를 훈련 시켜서 주인의 편지를 전달하게 했는데 그러한 비둘기를 '전서구'라 하였지요. 수많은 비둘기가 무리를 지어 먼 거리를 날아도 주인이 있는 비둘기는 자기 주인을 정확히 찾아 편지를 전해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비둘기처럼 순결하라'는 말씀은 '온순해라', '순진해라' '평화로워라' 하는 뜻이 아니고 '이 세상과 뒤섞여 살다가 주인을 잃어버리지 말고, 오직 비둘기처럼 주님 한 분에게만 충성하라'는 뜻입니다. 여기서의 순결은 도덕적인 순결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영적인 순결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믿음은 아무 문제도 일으키지 않는 온순한 믿음, 순진한 믿음이 아닙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만 충성하는 믿음을 원하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말씀은 참으로 우리에게 와닫습니다. 우리는 늘 갈등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것과 세상이 주는 즐거움과 쾌락을 갖고 사는 것 가운데 말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둘 중 하나만 선택해서 쭉 살아가야지 양손에 다 쥐고 살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화평함과 거룩함....” 쉽게 이야기 하자면, 세상의 유혹과 어두움에서 벗어나 평안하게 하나님의 품 안에서 자녀로서 하고 싶은 것 하면서 산다는 것입니다. 아주 당연하게 들리지만, 우리는 여전히 한 쪽은 세상이라는 집, 다른 한 쪽은 하나님의 집에 다리를 걸쳐 놓고 왔다갔다하며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우리의 마음을 아시고,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 말씀을 우리 마음에 새기고 깨달아서 하나님 기뻐하시는 자로 사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4절 말씀입니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우리는 아주 이기적인 존재입니다. 요즘 세상을 보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자신만 잘 살려고, 부모도 죽이고, 자식도 버리고, 남의 인생도 망치고 있습니다. 왜 그러냐고 분개하거나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이유가 성경에 쓰여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할 때부터 우리의 이기적인 모습은 이미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본능적으로 그런 것입니다. 살기 위해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평안과 축복이 없으면 그렇게 살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없다하고 의지하지 않는 사람들은 결코 화평함과 거룩함을 이룰 수 없습니다. 어느 누가 나쁜 짓을 해도, 그 나쁜 짓을 한 사람이 내가 강하기만 하면 나를 해칠 수 없다고 생각하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도 나를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면 항상 내가 다 가지고, 내가 최고가 되기 위해서는 늘 싸워야 합니다. 늘 투쟁하여야 합니다. 늘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없는 사람은 화평함이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화평함이 단지 하나님만 믿어서 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거룩함 또한 함께 가지고 있어야 온전한 화평을 누릴 수 있습니다. 여기서 문제는 거룩함을 단지 혼자 스스로 이룰 수 있냐는 것입니다.
새벽예배, 수요예배, 금요예배, 주일예배, 심지어 금식하고 40일 작정기도 수없이 한다하여 결코 거룩해질 수 없습니다. 힌두교나 소승불교에서는 자신을 괴롭히는 고행으로 능력도 생기고 거룩하여진다고 하는데, 제가 보기에는 몸과 영혼이 힘들다보니, 악한 영이 사로잡혀 마치 능력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마르틴 루터도 종교개혁 이전에 수도원에서 수없이 자신을 채찍질하고 고행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갈구했습니다. 그러나 고행을 하면 할수록 더 괴롭고 힘들고 영적으로 어두워져 갈 뿐이었습니다. 그 때 루터에게 하나님께서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 (롬 1:16~17; 3:23, 24, 28)이라는 말씀을 주셔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방법은 오직 "믿음"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무엇을 믿는 믿음입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값없이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희생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살아나셔서 하나님 우편에 우리를 위해 일하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너무 쉽습니다. 너무 믿기지가 않습니다. 인간의 상식으로는 맞지 않습니다. 거룩하기 위해 우리의 엄청난 죄를 씻어야 하는데 너무 쉽게 너무나도 댓가 없이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잘 믿지 않는 것입니다.
필리핀에는 매년 고난 주간이 되면 십자가를 지고 채찍에 맞는 행사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자신 스스로 예수님이 고난을 받은 신처럼 십자가에 매달립니다. 그들은 로마인들이 사용하던 채찍으로 맞으며, 십자가에 달릴 때도 진짜 못을 사용해서 손과 발에 못을 박습니다. 이런 고통을 당한다고 구원을 얻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이 목사님이 광부들에게 이야기 하신 것처럼,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는 구원은 값싸 보이고 단순해 보일지라도 엄청난 은혜의 힘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모든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죽으셨다는 것을 믿고 고백만하면 죄에서 벗어나 천국 백성이 되고, 구원을 얻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거룩함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루고, 또 서로서로 겸손히 섬기며 평화롭게 지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서로서로 하나님의 자녀로서 돌봐줄 수 있는지를 오늘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15절입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며
첫 번째로, 우리는 우리들 가운데 “은혜에 이르지 못한 자가 있는지”를 살펴보아할 것입니다. 구원은 우리의 행위와 상관없는 하나님의 귀한 선물입니다. 에베소서 2:8-9절에는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고 했습니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주신 선물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은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선물은 아주 값싼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비싼 다이아몬드를 모두 다 가져와 이곳에 쌓아 놓아도 구원과는 절대로 바꿀 수 없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은혜로 주신 구원이라는 선물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구원의 선물을 얼마나 값싸게 생각하는지 모릅니다. 자신이 천국 백성이 되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더 이상 귀신과 마귀의 권세에 눌리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아주 값어치가 없는 싸구려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 자신 뿐 아니라, 이 은혜를 소중히 여기지 않거나 잊고 지내는 자가 있다면, 하나님과의 첫사랑을 회복하여 늘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도록 애써야 합니다.
둘째로, 쓴 뿌리가 우리 안에 나서 나 뿐만 아니라 주위의 모든 사람들을 괴롭히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쓴 뿌리의 특징은 자신만 괴롭히는 것이 아닙니다. 쓴 뿌리의 특징은 오늘 말씀처럼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발람이라는 이방의 거짓 선지자가 나옵니다. 이 선지자는 돈을 아주 사랑하는 이방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모압 왕 발락이 많은 돈을 주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해 달라고 부탁을 받고 가던 길에 나귀를 통해 하나님의 경고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경고에 두려움 때문에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한 가지 악한 꾀를 생각해 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우상의 제물을 놓아두고 피곤하고 지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의 제물을 먹고, 우상을 섬기는 이방의 여인들과 동침하게 하여 간음의 죄를 범하게 한 것입니다(계2:14). 이렇게, 우리의 쓴 뿌리가 교회를 무너뜨리고, 성도들을 괴롭히는 걸림돌이 돼서든 안 될 것입니다. 이어서 또 우리가 주의해야할 것은 무엇입니까?
16~17절 말씀입니다.
16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
17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넷째로, 회개할 기회를 놓쳐서는 안되겠습니다. 예전에 “노아”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거기서 보니, 굉장히 충격적인 장면은 비가 오고, 홍수가 나서 세상이 끝날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사람들은 여전히 죄를 저지르고, 살기 위해 살인을 저지르고, 무기를 만들어서 방주를 빼앗으려고 하는 점이었습니다. 곧 세상이 끝나고 하나님께서 벌하신다는 것을 알면서도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모습은 참으로 충격적이었습니다. 반복적으로 인간이 어떻게 죄를 지었고, 계속해서 악행을 저지르는 장면을 보여줌으로 이 영화의 감독인 대런 아로노프스키 (Darren Aronofsky)는 인간이 얼마나 어리석고 끝까지 회개치 아니하는 교만함을 가지고 있는지를 강조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오늘 말씀에도 에서에 대해 말합니다. 장자의 명분을 팥죽 한 그릇에 팔아버린 황당한 일을 에서는 저지릅니다. 장자는 무엇입니까? 당시에는 큰 아들에게 가문의 책임도 맡기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도 주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에서를 “망령된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망령되다”라는 말은 “귀중한 것을 귀중히 여기지 않는다!!”라는 뜻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축복을 소중히 여기지 않고 마음대로 살다가 회개할 기회도 못 얻고 돌이킬 수도 없는 지경으로 빠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을 소중히 여기며 하루하루를 살아야 합니다. 세상의 것이 더 좋아 보이더라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때로는 감당하기 어렵고 귀찮고 힘들어도 귀중히 여겨야 합니다. 왜냐? 우리는 회개할 기회를 항상 얻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에서가 팥죽 한 그릇 먹고 장자의 명분을 팔고도 자신이 잘못했다는 것을 모르고 살다가 회개할 기회를 놓쳐서 영영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했던 것처럼, 마지막 날이 오면, 우리가 아무리 회개하고 싶어도 회개할 수 없는 그 날이 반드시 오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요? 이야기 하나 소개하며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한국교회 초기에 유명한 부흥사로 알려진 이성봉 목사님이 계십니다. 그분이 만주에서 말씀을 전하고 계실 때에 어느 교회 장로님이 아편 장사를 해서 돈을 많이 버는 것을 보았습니다. 해서 목사님이 “교회의 장로가 그런 방법으로 돈을 벌어서야 되겠느냐? 속히 손을 떼도록 하라”고 권면했더니 그가 말하기를 “아들이 하나 있는데 그놈 대학 졸업할 때까지만 이 장사를 하고 그만 두겠다”고 했습니다. 몇 년 후에 다시 그를 만났는데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 장로의 아들이 대학을 이미 졸업했는데도 여전히 아편 장사를 하고 있더랍니다. 이성봉 목사님이 “왜 아직도 그 일을 계속 하느냐?”고 했더니 그 장로가 하는 말이 “한 밑천 잡고 그만 두겠다”라고 하더랍니다. 얼마 후에 또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장로가 통곡을 하면서 그 외아들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했습니다. 알고 보았더니 그 장로의 아들은 아편 중독자가 되었고, 죄를 지어 일본 헌병대에 끌려가 고문을 받고 완전히 폐인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많은 사람들에게 죄에서 떠나 돌이킬 기회를 주십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기회를 아주 가볍게 여기고, 자신의 욕심을 버리지 않아 결국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우리가 들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쓴 뿌리가 있고, 하나님의 은혜를 소홀히 여겨 회개할 기회를 잃어버린다면 세상의 그 어떤 저주받은 사람보다 더 불행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안에서 늘 살면서 화평함과 거룩함으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함께 사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은혜로우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어 믿음으로 구원받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늘 겸손히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게 하시고, 혹시 세상에 마음을 빼앗겨 죄를 짓는다 하더라도 속히 하나님 앞에서 무릎꿇고 회개하게 하옵소서. 우리가 믿음을 굳건히 지키면, 우리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고, 붙들어 주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으며 이 모든 말씀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온누리선교교회 > 한국어예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 받는 복 (시편 25:12~14 주일예배 20190728) (0) | 2019.07.26 |
---|---|
고린도후서 강해 13) 하늘의 영원한 집 (수요예배 20190724) (0) | 2019.07.23 |
고린도후서 강해 12) 영원한 영광을 위하여 (수요예배 20190717) (0) | 2019.07.16 |
평화의 왕으로 오시 예수님 (엡 2:14~18 주일예배 20190714) (0) | 2019.07.11 |
고린도후서강해 11) 질그릇에 담긴 보배 (수요예배 20190710) (0) | 2019.07.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