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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누리선교교회/한국어예배

야고보서 강해 17) 단물과 쓴물 (수요기도회 20230503)

by 온누리선교 2023. 5. 3.

 

성경본문: 야고보서 3: 9-12

 

9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10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11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

12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냐 이와 같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

 

설교: 단물과 쓴물

 

톨스토이의 글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자기 집에서 일하던 두 종이 하루는 서로 싸우고 있습니다. 큰 소리가 들리기에 톨스토이가 나가서 보니까. 종 둘이서 서로에게 별명을 붙인 것이 감정을 상하게 하였던지 서로 말다툼을 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좀 훌쪽하게 생긴 종이 뚱뚱하게 생긴 종에게 곰이라는 별명을 붙였습니다. 그러자 곧 뚱뚱하게 생긴 종이 홀쪽하게 생긴 종에게 원숭이라고 별명을 붙인 것입니다. , 원숭이하면서 서로 티격티격 언쟁을 합니다. 이 모습을 바라본 주인이 이런 말을 하면서 서로의 불화를 중재시켜 갔습니다. 그 홀쪽하게 생긴 종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가 저 사람들 곰이라 불렀지, 너는 저 사람이 곰이기 때문에 곰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 아니다. 네 마음 속에 곰과 같은 마음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저 사람을 곰이라 부른 것이다." 그리고 그 곰이란 별명을 가진 뚱뚱한 종에게는 "너가 저 사람을 원숭이라고 불렀지, 저 사람이 원숭이 같은 마음이 있기 때문에 저 사람이 네겐 원숭이처럼 보여진 게다"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에 우리에게 무엇인가 던져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믿음의 마음을 가지게 되면 이 세상 모두가 하나님의 창조물, 하나님의 세계로 더 깊이 인식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시각으로 사람을 보느냐에 따라서 헐뜯을 수도 있고 그를 격려할 수도 있고, 그를 일깨울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15:18)라고 하신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오늘 야고보 사도는 이 점에 대해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말이 얼마나 하나님의 자녀로서 중요한지 함께 깨닫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9-10절의 말씀입니다.

9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10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야고보서는 예수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은 일구이언(一口二言)할 수 없음을 경고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를 동시에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일관성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이해가 새롭게 변화된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의 문제인 것입니다. 대화의 상대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다.’는 인식의 근본적인 변화는 대화의 내용과 수준의 변화를 요청합니다. 대화란 대놓고 화를 내는 것의 준말이라는 농담이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는 대화에 서툴고 말로 쉽게 상처를 주고 받습니다. 이는 단순히 화술을 배우고 훈련하는 것만으로 극복하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모두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죄인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은 죄로 오염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격적인 대화와 소통의 시작은 예수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것에서부터 출발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 되었어도 두 마음으로 살아가는 신앙생활은 혀의 이중성으로 나타납니다.

 

만 개의 입이 있어도 그것을 다 가지고 주님의 은총을 찬양하겠노라는 찬송의 고백과 같이 그리스도인의 입술은 찬송과 저주 중에 선택할 자유가 없으며 오직 주님을 찬양하며 사랑을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라는 믿음이 찬송을 낳는 것처럼 우리의 대화 상대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존귀한 존재라는 믿음은 대화를 변화시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성경의 인간론은 인간 안에 신적인 존귀함이 있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언약적인 관계, 특별한 관계가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단 한 번도 유일하고 온전히 자율적이며 타인과 관계가 없는 존재였던 순간은 없었습니다. 인간은 언제나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 타인과의 관계 및 창조된 하나님의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존재합니다. 11절의 내 형제들아라는 표현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흐르는 새로운 관계를 맺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은혜를 베푸신 것처럼 대화의 상대도 하나님과 소중한 관계 안에 살아가고 있다는 믿음은 대화의 내용과 태도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감히 하나님께 저주할 수 없는 것처럼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존귀한 존재이기에 저주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1세기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를 말하는 모순적인 신앙생활이 있었고 이와 같은 언어생활의 이중성은 오늘 우리의 삶 속에도 발견됩니다.

 

11-12절의 말씀입니다.

11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

12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냐 이와 같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

 

물이 귀한 환경에서 생활했던 유대인들에게 물은 곧 생명과 직결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기후는 우기와 건기로 구분되며 비가 오지 않는 6개월의 건기를 버티기 위해서는 마을마다 우물이 필요했습니다. 강수량이 상대적으로 적었던 브엘세바에서는 우물을 얻기 위해 150-200m까지 땅을 파는 수고를 해야했습니다. 11절에 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우물의 근원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피조세계를 다스리시는 원리는 한 샘에서 단 물과 쓴 물이 나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단 물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공급하며 많은 사람들을 주변으로 모으는 힘이 있지만, 쓴 물은 사람들에게 외면 당할 뿐입니다. 12절의 헬라어 어순은 부정적인 대답을 끌어내는 의문문으로 시작됩니다. 무화과나무에서 감람 열매를 얻을 수 없고 포도나무에서 무화과 열매를 얻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주님은 산상수훈 중에 믿음과 행위의 관계를 나무와 열매의 비유를 통해 교훈하셨습니다.

 

마태복음 7:18-21에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아멘!

주님은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씀하심으로 그리스도인들이 두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것을 원천 봉쇄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두 마음이 아닌 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은 믿음에 합당한 삶을 나태내는 것입니다. 이는 단순히 말씀을 삶의 규범으로 삼아 지키는 태도가 아니라 말씀을 사랑함으로 자발적이고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은 장차 온전히 나타날 미래적 하나님 나라의 필요조건이며 동시에 현재 우리가 누리는 하나님 나라의 삶의 표지입니다. 이미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에 동참하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인생다운 책임감 있는 삶이 요청됩니다. 주님께서는 믿음이 단지 내면의 확신이나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같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변화된 행동을 수반하는 실제적인 것임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는 주님의 말씀은 믿음과 삶이 별개의 것이 아님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믿음과 삶은 나무와 열매처럼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복음은 우리의 속사람을 먼저 변화시키고 우리의 삶에 열매를 맺게 합니다. 복음은 생명력이 있어 반드시 열매를 맺습니다. 열매 없는 나무가 죽은 나무인 것처럼 변화된 삶은 거듭난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표지입니다. 교회 밖의 사람들은 말은 그 사람의 인격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의 입술의 열매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로 변화된 우리의 인격만 만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성령님을 보게 됩니다. 이는 단순히 그리스도인들이 말을 주의해야 한다는 윤리적 교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말로 대표되는 우리의 삶과 믿음의 관계를 돌아보게 합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사람은 말 한대로 삽니다. 평소의 입버릇대로 삽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입이 그 사람의 미래입니다. 믿음과 칭찬과 축복과 감사의 말을 하세요. 그러면 기분이 좋아지고, 몸이 가벼워지고, 마음이 행복해지고 그러면 나 자신도 좋고 남도 좋고 모두가 좋아집니다. 서로 서로 좋아하면 하는 일마다 잘 풀리고 재산이 불어납니다. 말은 에너지입니다. 좋은 말은 좋은 에너지이고 나쁜 말은 나쁜 에너지입니다. 좋은 에너지가 흘러 넘치면 나도 좋고 남도 좋습니다. 사람은 말 한대로 삽니다. 평소의 입버릇대로 삽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입에서 절대로 쓴물이 나와서는 안됩니다. 단물만히 흘러나와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늘 하나님을 높이는 찬양만이 우리의 마음으로부터 입으로 나와서 절대 우리 안에 저주에 대한 말이 단 한마디도 있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주는 우리의 생명을 갉아먹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한 걸음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함께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을 나의 구원자로 고백하며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며 살 수 있도록 믿음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가 입술로는 주님을 믿노라고 고백하면서도 믿음을 삶으로 나타내지 못한 일들을 회개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거듭났음에도 두 마음을 품고 이중적인 삶을 살았던 모습에서 돌이켜 주님의 말씀을 사랑하며 힘써 지킴으로 하나님 앞에서 나뉘어지지 않은 전심으로 예배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그렇게 우리의 삶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우리의 믿음을 나태 낼 수 있도록 붙들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