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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전서 강해 2)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수요기도회 20230823)

by 온누리선교 2023. 8. 23.

 

성경본문: 베드로전서 1:3-6

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5.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6.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설교: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고대 근동지방에는 죄수를 처형하는 십자가형이 있습니다. 죄수를 십자가에 나무나 끈으로 매달아놓은 뒤 깊은 웅덩이를 파고 십자가를 세워 기진맥진하게 만들어 죽이는 방법입니다개인에 따라 다르지만 어떤 죄수는 1주일동안 십자가 위에서 달려 있었다는 것입니다. 몇 번이나 까무러졌다가 살아나고 다시 또 까무러지고생사의 갈림길에서 죽음연습을 하다가 급기야 숨이 떨어지는 무서운 형벌입니다그런데 이 죽음을 누가 당했습니까.우리 구주 예수님께서 그렇게 돌아가신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이 십자가 처형은 성난 군중의 성화와 압력에 못이겨 본디오 빌라도가 허락한 것이지만 엄밀히 따지면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것입니다우리의 죄가 너무 중하고 도저히 우리 힘으로 구원받을 수 없어서 하나님께서 역사속에 내려오셔서 십자가 처형을 계획하신 것입니다. 말로써 온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지만 사랑은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란 사실을 보이기 위해 독생자를 십자가에 매달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것입니다따라서 구원은 우리에게는 공짜지만 하나님은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란 바로 아들을 죽이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그 놀라운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 사도는 그 십자가의 놀라운 사랑으로 우리의 구원이 참으로 복되다는 것을 오늘 말씀을 통해 말하고 있으며 그로 인해 받는 고난이 참으로 귀하다는 기쁨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 의미를 우리가 오늘 함께 살펴봄으로 크나큰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함께 느끼시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4절의 말씀입니다.

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네로황제의 기독교 대 박해를 기점으로 로마제국 전역으로 확산되고 있는 박해와, 궁극적으로는 시대를 초월하여 있을 교회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핍박 속에서 성도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가르침을 주기 위해 기록한 성경이 바로 베드로전서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가르침을 시작하는 첫 말씀은 무엇입니까?

바로 찬송하리로다입니다.

고난 중에 탄식하며. 핍박하는 자들에게 심판을 선포하고 간절하게 우리의 형편을 하나님께 아뢰고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 이것이 고난과 시련 속에서 우리가 취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삶의 자세라는 것입니다.

이 가르침이 이해가 가십니까? 마음에 와 닫습니까?

사실, 시련과 고난이 없을 때는 아멘하기 쉽다가도, 막상 고난에 부닥치면 아멘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타인의 고난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쉽게 기도하겠습니다, 기도하십시요라고 권면을 하지만, 막상 자신에게 고난이 닥치면 기도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감당하기 어려운 일들이 자신에게 정면으로 다가오면 기도보다는 두려움에 빠지거나 불평불만을 내뱉기가 쉽습니다. 시련과 역경 속에서 우리의 입에는 어느덧 원망과 불평의 열매가 주렁주렁 달리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은 고난의 시련 앞에 우리가 섰을 때 우리가 할 것은 불평불만이 아니라 찬송이라고 말씀합니다.

물론,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이를 충분하게 증명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새벽기도 말씀에서 살펴보았듯이 요셉은 형제들에게 배반을 당하고, 애굽에 종으로 끌려가고, 모함으로 인해 옥에 갇혀도 결코 복수를 하거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사자굴에서도, 화형장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기독교 역사를 통해 수많은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고난 속에서 우리 성도들이 가져야 할 자세는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우리에게 주실 하나님을 신뢰하고 찬송하는 것임을 증명해 보였습니다. 먼저 된 믿음의 선배로서 우리들에게 그렇게 하는 것이 성도의 자세임을 분명하게 증명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교회를 박해하는 북한, 무슬림 국가 등 많은 국가에서 죽음의 위협을 받고 있지만, 그 속에서도 찬송하는 많은 성도들이 있습니다. ‘성도는 고난 중에도 찬송한다는 이 사실은 지금도 변하지 않는 영적인 진리임을 그분들이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난 중에 찬송하는 것은 우리의 속사람이 그만큼 성숙해지고 견고해졌다는 분명한 증거가 됩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무턱대고 찬송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3절 후반부에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하셨기 때문이라는 분명한 이유를 밝히며, 이러하신 하나님을 찬송하라고 말씀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고난 중에서조차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는 근본적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죄인에서 의인으로, 불순종의 자녀에서 순종의 자녀로, 어둠의 자녀에서 빛의 자녀로 거듭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으로 인해 거듭나게 되었습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대속의 피로 인해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잘나서가 아니라, 우리의 선행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대신 감당하셨기에 거듭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거듭났다는 말속에는 죽음의 저주까지도 이길 수 있는 예수님의 영원한 생명력이 우리 안에 있다는 사실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이 영원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산 소망이 있다고 말씀하는데, 이 산 소망은 세상의 썩어질 소망들과 대비되는 소망입니다.

그렇다면 이 소망은 헛된 미신적인 소망입니까? 한번 우리가 깊이 이렇게 생각해봅시다.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는 전 세계에 가장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이야기라고 합니다. 나라마다 등장인물이나 배경은 약간씩 다르지만 이야기의 맥락은 거의 비슷합니다. 어떤 신학자는 아마도 예수님의 부활 승천과 재림, 그리고 성도의 부활에 대한 이야기가 뚜렷한 전달수단이 없던 옛날에 입에서 입으로 각 나라에 전파되면서 약간씩 변형된 것이 아닌가 하고 보기도 합니다.

하늘의 선녀들이 깊은 산 속에 있는 폭포에 내려와 목욕을 하는데, 나무꾼이 산에 나무를 하러 갔다가 덫에 걸려 죽어 가는 노루를 구해준 댓가로 노루가 알려준 대로 천사들을 발견하고 천사의 날개옷 하나를 감춥니다. 선녀는 하늘로 귀환하지 못한 채 결국 나무꾼과 결혼해 자녀까지 낳고 삽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으로부터 날개옷을 돌려 받은 선녀는 홀로 하늘로 귀향해 버리고 나무꾼은 노루가 절대로 날개옷을 꺼내주면 안 된다고 했던 다짐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리는 스토리는 서양버전입니다.

선녀가 자녀들을 양 옆구리에 끼고 하늘로 올라가고 이어 땅으로 내려오지 못하게된 선녀들이 두레박을 내려 물을 긷자 나무꾼이 두레박을 살짝 타고 다시 하늘로 올라간다는 스토리는 동양의 여러 나라에서 발견할 수 있는 동양버전입니다.

한국 버전은 또 다른데, 하늘로 올라간 남편은 지상의 노부모가 걱정되어 선녀가 준 용마를 타고 지상에 내려오지만 노모가 끓여준 뜨거운 팥죽을 먹다가 흘리는 바람에 용마가 놀라 도망가 하늘행을 포기하고 노부모와 함께 여생을 산다는 이야기로 끝납니다.

기독교 버전으로 바꾼다면 아마도 나무꾼이 노부모까지 용마에 태워 하늘로 데려간 뒤 온 가족이 함께 영생을 누리는 해피앤딩으로 끝날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탄생, 십자가, 부활, 승천의 여정이 바로 성도들의 천국행이 해피앤딩으로 끝남을 보여주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5~6절의 말씀입니다.

5.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6.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여기서 시험이란, 우리의 신앙을 빼앗기 위해 다가오는 유혹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이 더욱 강해지도록 주시는 시련을 의미합니다. 이 시험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해 주시지 않기 때문에 오는 시험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성숙을 위한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주어지는 하나님의 사랑 어린 훈련의 한 방편입니다.

성도가 갖가지 고난과 시련을 기쁨으로 받아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성도의 신앙을 순수하게 만드는 훈련의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숙하고 견고한 신앙을 가지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그 시련에 기쁨으로 동참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런 시련이라고 해서 고통스럽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은 분명히 이 시련이 성도들을 근심하게 한다고 말씀합니다.

막상 인간적인 관계나 경제적인 상황만 어려워져도 걱정근심이 밀물처럼 몰려오는데, 하물며 베드로전서가 쓰여질 당시처럼, 목숨을 위협하는 박해가 폭풍우처럼 몰려온다면 어떻겠습니까?

그러나 그러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청하시는 삶의 태도는 무엇입니까?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당하는 시험은 잠깐이지만, 그 시험을 통과한 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은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많은 시련을 겪고 나야 비로소 믿음의 삶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쉽고 가벼운 것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야 비로소 시련 중에도 오히려 하나님께서 주실 상급을 바라보며 기쁨으로 극복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고난에 대한 반응이 곧 신앙의 척도가 된다는 것을 기억하여, 고난 중에 스스로의 신앙을 되돌아보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부탁드립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삶의 고난 앞에서 저희가 가져야 할 자세는 두려워 뜨는 마음이 아니라, 또한, 고난을 이기기 위한 결단과 용기가 아니라 하나님을 찬송하고, 주신 은혜로 인해 기뻐하는 것임을 오늘 가슴 깊이 새깁니다. 우리의 힘과 능력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임을 고백하오니, 내 힘으로 이기려다 넘어지는 어리석은 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더욱 의지함으로 날마다 승리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이 모든 말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