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고린도전서 1: 18
18.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설교: 십자가, 하나님의 능력
어머니와 아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와 아들 모두가 글을 알지 못합니다. 글을 알지 못하는 어머니는, 아들이 멀리 떠나게 되자, 아들을 생각나게 해 주는 표를 가지고 싶었습니다.
지금처럼 사진을 가질 수도 없었을 때, 어머니는 문신을 새겨 주는 사람에게 가서, 손바닥을 내어 밀었습니다. 그리고 아들이 보고 싶을 때에, 늘 기억할 수 있는 것을 그려 달라고 하였다.
아마도 문신을 하는 사람은, 어머니의 손바닥에 바늘로 한 점 한 점씩 찔러가며, 아들의 모습을 새겼을 것입니다. 비록 아들은 먼 곳으로 떠나갔지만, 어머니는 날마다 그 아들을 생각하며, 보고플 때에는 손바닥에 새겨진 아들의 얼굴을 보면서, 위로를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침에 손을 씻을 때에도, 밥을 지을 때에도, 일을 할 때에도, 언제나 아들은 그렇게 어머니의 손바닥에, 그리고 어머니의 가슴 속에 있었습니다. 손을 물에 넣어도, 지워지지 않고, 닳아 없어지지도 않습니다.
어머니는 일을 할 때나, 쉴 때나, 언제나 손바닥에 새겨진 것을 보고, 아들을 생각하였을 것이며, 아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아들을 마음에 그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어머니가 살아 있는 동안, 그 손바닥에는 언제나 아들을 생각나게 하는 것이 있었으니, 그 아들은 이렇게 항상 어머니의 마음에 있었고, 어머니의 생각 속에 있었습니다. 이것이 곧 이스라엘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이사야서 49: 15~16에 보면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라고 말합니다. 손에 새긴 것도 모자라서 십자가 위에서 몸 전체에 사랑의 흔적을 남기셨습니다.
혹시 하나님의 사랑이 의심스러우면 십자가를 보시기 바랍니다. 저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죄없이 크나큰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서 처참하게 가시관을 쓰고 돌아가셨습니다. 그의 죽음으로 “악”이 승리한다고 모든 이들이 생각하였지만, 많은 사람들이 사망을 이기시고 3일만에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보았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많은 이들 앞에서 “다시 너희들에게 오겠다!”라고 말씀하시며 승천하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의 고통, 죽음, 그리고 부활의 과정이 바로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 시간 어머니의 사랑보다 더 큰사랑을 베푸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함으로 말미암아 사랑의 흔적을 내 몸에도 새기고, 그 예수님께 더 많이 감사하고, 그 은혜를 우리는 이제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는 삶을 살아감으로 예수님이 고난 당하신 기간에, 우리의 신앙이 다시 회복되고, 다시 찾아지고, 다시 사는 역사가 일어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주님께서 주신 성경말씀인 18절 말씀을 함께 봅시다!
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우리 주변에는 많은 사람이 안경을 착용하고 있습니다. 조사한 결과를 보면 초등학생은 27,9% 가 안경을 착용하고, 중학생은 49.1%, 고등학생은 58.9%로 학년이 올라갈수록 시력이 나빠져서 여고생의 경우에는 61.6%가 안경을 착용한다고 합니다. 성인의 경우에는 44.7% 가 착용한다고 하니 - 이제 거의 인구의 절반정도가 안경을 착용하고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반수이상이 안경의 도움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원래 우리 인간은 우리의 조상 아담과 하와의 원죄로 말미암아 영적인 시력을 잃었습니다. 그때부터 인간은 모든 것을 제대로 보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습니다. 하나님도 제대로 볼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가치 있는 인생인지도 모르게 되었습니다. 죄를 지어 놓고도 죄의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게 되었습니다. 영적인 시력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영적으로 시력을 잃은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은 대대적인 영적인 개안수술을 했습니다. 그 수술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돌아가시게 함으로서 우리의 영적인 눈을 가렸던 죄와 죽음, 슬픔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므로 인류는 영적으로 어두웠던 눈을 새롭게 뜨게 된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사역을 믿음으로 인해 영적으로 새로운 눈을 뜨게 되었고,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그 십자가의 사역을 믿는 사람도 있고, 그 십자가의 사역을 믿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한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 ‘십자가의 도’는 ‘십자가의 말씀’으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말씀은 구원을 받은 우리에게는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사하셨으니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다는 복음은 세상 사람에게는 미련하게 보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한 종류는 멸망하는 자들이고 또 한 종류는 구원받는 자들입니다. 구원받는 자들은 복된 사람들입니다. 십자가의 말씀을 들을 때 미련하게 여기지 않고 말씀을 믿어 구원을 얻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말씀을 통한 구원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실상 지혜 있는 자들이나 총명한 자들이 그들 자신의 지혜와 총명으로 십자가의 도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십자가의 말씀을 받아들일 눈과 귀가 열리게 되어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진리를 알고 있는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 어떠신 분이십니까? 고린도전서 1장 20절에 다음과 같이 바울 사도는 말하고 있습니다. “.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아멘!
세상의 지혜 있는 자나 학자, 수사학적 능력을 자랑하는 변론가도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높고 깊어서 가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셨다’라고 말하기까지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구원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며, 하나님이 주시는 방법으로만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셨으니 세상의 지혜는 하나님을 절대로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지혜인 십자가의 도에 대해 당시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요?
첫 번째로, 유대인들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이 달리셨다는 십자가는 기분 나쁜 것이었습니다.
왜 기분 나쁜 것이 되었을까요? 성경대로 말하면 거리끼는 것이 되었을까요? 원래 유대 사람들은 “표적, 초자연적인 이적”을 좋아했습니다. 그들은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보시면 알겠지만 출애굽부터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까지 그들에게는 놀라운 하나님의 이적이 연속적으로 일어났습니다. 애굽에서 종살이 할 때 10가지 이적으로 통해서 해방시켜주었습니다. 홍해를 육지처럼 건너도록 해 주셨습니다. 광야생활을 할 때는 불기둥, 구름기둥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반석에서 물을 내어 주셨습니다.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주셨습니다. 이렇게 그들은 하나님의 표적을 보면서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이 기대하는 메시야, 구원자도 이런 표적을 행하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라는 한 청년이 나타나더니만, 여러 가지 기적을 행해서 혹시나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나중에 보니 큰 표적은커녕 중한 죄인만이 달려서 죽는 십자가에 달려서 죽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직도 이럭 표적의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만 하나님의 구원을 보지 못하는 참으로 안타까운 사람들입니다.
둘째로 이방인들입니다.
이방사람들의 대표로 본문에서는 헬라인을 들었습니다. 헬라하면 그리스들 말하지요? 그리스 하면 무엇이 생각이 납니까? ‘파르테논 신전’이 생각이 날 것입니다. 파르테논 신전 앞에는 철학자들이 철학을 논하고 토론했던 아레오바고 언덕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소크라테스’, ‘플라톤’과 같은 아주 뛰어났던 똑똑한 철학자들이 모여 토론 했습니다. 철학자들은 이성적인 지식으로 어떤 경지에 들어가기를 바랐고, 어떤 사건도 이성적으로 풀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는 그들의 철학적인 지식으로 보면 아주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본문에서처럼 그들은 “미련한 것”으로 여겨버렸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어떠한 똑똑한 사람도, 지식이 많은 사람도, 지혜가 뛰어난 사람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십자가의 도를 알 수가 없습니다.
옛날에 어떤 사람이 일하던 중 피곤하여 밤나무 밑에서 잠을 자려고 누워 있다가 이런 생각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구? 참 어처구니가 없단 말이야. 왜 아름드리 밤나무에는 조그마한 밤이 열리게 하고 새끼손가락보다 가는 호박 덩굴에는 큰 호박이 열리게 하셨을까? 만일 내가 하나님이라면 호박 덩굴에는 밤만한 호박이 달리게 하고 밤나무에는 호박만한 밤이 열리게 할 텐데. 그것 하나 따가지고 삶아서 모두들 나누어 먹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 투덜대다 그는 잠이 들었습니다. 한참 코를 고는데 갑자기 ‘딱!’ 하더니 알밤 하나가 이마에 떨어졌습니다. 깜짝 놀라 일어난 그는 이마에 떨어진 알밤을 보고는 얼른 무릎을 꿇고 ‘하나님, 감사합니다. 밤이 호박만 했더라면 제 머리가 박살났을 텐데, 밤을 작게 만들어 주셔서 참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매번 교회에 와서 십자가의 능력,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능력에 대해 듣습니다. 이에 대해 우리는 하나님이 얼마나 놀라운 일을 하셨는지에 대해 제대로 느끼고 있습니까? ‘만약에 하나님께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주시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라는 생각을 하며 진지하게 감사하는 일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런데 그런 감사를, 그런 생각을 잘 하지 않는다는 것이 참으로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하나님의 계획은, 하나님의 지혜는 세상의 어떤 지혜보다 놀랍고 더 뛰어납니다. 소크라테스가 와도, 플라톤이 와도, 그 어떤 사상가가 와도 이렇게 계획하고 생각하고 의미를 맞추어 댈 수 없습니다. 다 하나님 앞에서는 미련합니다. 이것을 세상 사람들은 다 모르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담긴 놀라운 지혜를 깨닫지 못하고 그 안에 있는 놀라운 구원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마치 모세가 광야에서 놋뱀을 들었을 때 믿음으로 바라본 자들이 산 것처럼 십자가의 복음은 세상의 지혜가 아닌 어리석고 미련하게 보이는 순수한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방법을 붙잡는 자들에게 구원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단순한 십자가가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 놀라우신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지하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항상 승리하고 복을 받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우리의 모든 것 되시는 주님~!
십자가를 붙잡고 주님의 지혜를 날마다 구하며 살겠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지혜를 가지고 살면서 힘들어하며 넘어졌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십자가 능력으로 일어나 걸으며 주님의 복음을 선포하며 살길 원하오니, 우리와 함께 하옵소서~ 이 모든 말씀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온누리선교교회 > 한국어예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너희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벧후 1:8-11, 주일예배 20240417) (0) | 2024.04.14 |
---|---|
온라인예배 20240407 (0) | 2024.04.07 |
베드로후서 강해 5) 거짓 선지자들에 대하여 (수요기도회 20240403) (1) | 2024.04.03 |
부활주일설교) 영생 얻고 복받는길 (고전 15:3-4, 요 3:16 , 김지연 목사_성린교회 원로목사) (0) | 2024.03.31 |
온라인예배 20240331 (0) | 2024.03.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