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요한복음 1장 35절~39절
35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36 예수의 다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37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좇거늘
38 예수께서 돌이켜 그 좇는 것을 보시고 물어 가라사대 무엇을 구하느냐 가로되 랍비여 어디계시오니이까 하니(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
39 예수께서 가라사대 와보라 그러므로 저희가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제 십시쯤 되었더라
제목: 무엇을 구하느냐? 와보라
“될 성 싶은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간혹 자식의 게으름이나 불성실 때문에 속상하신 부모님들이 자녀들이 어렸을 때 훅하고 뱉어내시는 말이지만, 사실 이 말은 유전적으로 원래 그렇게 태어난 아이가 있다는 뜻은 아니라고 저는 믿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대기만성[大器晩成]”이라는 큰 그릇은 늦게 만들어진다는 사자성어도 있기 때문입니다. 즉, 원래 큰 인물은 실수도 하고 잘못도 하고 하지만 큰사람은 늦게 이루어진다는 뜻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점은 무엇이겠습니까? 자녀가 어떤 곳에 정신을 못차릴 정도로 관심을 갖는지가 중요한 것입니다. 예를 들면, 저같은 경우, 국민일보가 오면, 먼저 미션부분부터 읽게 됩니다. 세상일 돌아가는 것을 알기 위해 신문을 읽지만, 저는 목회자이고 크리스찬인지라, 선교동향이나 기독교상황을 먼저 알고 싶어하기에 미션부분을 먼저 읽게 되는 것입니다. 관심이 어디에 있느냐 이것으로 사람은 세상에서 성공하고 안성공하는데 승패가 달려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세례요한에게 받고 나셔서 이제 사역을 시작하시려고 할 때에 제자들이 한 둘 씩 모여들었습니다. 그 중의 첫 제자들은 바로 세례요한을 따르던 안드레와 요한이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세례요한을 통한 하나님의 뜻이 있었습니다. 세례요한에게는 많은 제자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 많은 제자들 앞에서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제자들이 다 이 말에 반응한 것이 아니라 오직 두 사람, 안드레와 요한만이 귀가 번쩍 뜨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들은 메시야, 그리스도를 간절히 기다렸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이 그리스도일 것이다라는 소문을 듣고 세례요한의 곁에 계속 있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를 계속 들으며, 간절히 소망하는 마음으로 메시야를 기다렸고, 그러던 와중에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는 확실한 증거를 들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이 분명한 세례요한 선생님의 증언을 듣고 머뭇거릴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36절에 보면, 두 제자가 세례요한의 말을 듣고 바로 예수를 좇아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발적인 좇아감이고 따라가는 것이었습니다. 그 누가 시켜서 그런 것도 아니고, 강제로 강권하여 예수님께 간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들 마음 안에 그리스도를 간절히 기다리고 소망하는 마음을 소유하였기에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들이며 구원으로 들어가기 위해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하는 자세까지 준비되어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신 예수님은 안드레와 요한에게 물으셨습니다. “무엇을 구하느냐?”
사람들은 그 누구를 따를 때 그 누구에게 바라고 구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돈이 될 수도 있고, 그것이 명예가 될 수도 있고, 그것이 생존하기 위함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그 사람이 내게 무엇을 원하는가를 확실히 알 필요가 있고, 그것을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질문하신 “무엇을 구하느냐?‘라는 질문은, 두 제자에게 “너희는 무엇 때문에 나를 따르느냐? 너희가 궁극적으로 찾아 구하는 것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으로 두 제자의 따르는 동기를 확고하게 굳히기 위한 말씀이셨습니다.
요한복음 내에서 처음으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엇을 구하느냐?”라는 말이 우리에게 큰 뜻으로 다가옵니다. 이 말씀은 두 제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도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하시던 시점에 제자들이 따라오자, 반가워하시며, 잘 왔다.. 하시지도 않았고, 거드름피우며 무시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다만 죄악된 세상에서 안드레와 요한이 참으로 구할 것을 아는가를 아시고 싶으셨고, 또 그것을 확신하고 자신을 따라오도록 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길어봤자 100년의 삶을 사는 동안 이생의 자랑과 육신의 정욕만을 위하여 살아가는 것을 너무나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기에 세상을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사람들에게 돈도, 명예도, 건강도, 그 외의 세속적인 것에 대해 자유롭고 또한 사람들의 욕망을 한 없이 채워주실 만한 능력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 영적인 생명과 하나님 자녀로서의 거룩한 삶이 얼마나 필요한지도 알고 세상을 컨트롤하는 능력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당시 사람들이 메시야를 기다리지만 그들이 원하는 메시야... 당시 사람들의 욕망만을 채워줄 초월적인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음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구약성서에서 그렇게 많은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하였던 메시야에 대해서는 저나름대로의 해석만을 가지고 외면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제물이며, 하나님의 사랑을 징표로 사람들을 위해 희생하는 구원자를 한낱 세속의 막강한 왕으로 권력자로 상상하며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만났을 때, 예수님에 대해서 어떠한 이미지와 바람들을 갖고 있었는지 잘 한번 생각해보도록 합시다.
저 개인적으로는 질풍노도의 전두환 및 노태우 대통령 정권을 지나온 사람이라 예수님에 대해서 저는 정치적 종교적 환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많은 노동자들과 가난한 사람들, 젊은 청년들이 군사정권에 의해 고통당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마치 교회라는 틀 밖에서 나오지 못하고 사람들에게 의해 조종당하는 그런 삐에로 줄 인형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교회 밖으로 나오시고, 예수님께서 진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세상을 뒤집어 엎어버리는 그런 신적인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예수님에 대한 구원자시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존재자체는 부인할 수 없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제발 내가 바라는 그런 분이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만나기를 원하였습니다. 환상이던 영으로든 간에 말입니다.
또 제가 부목사로 있었던 시절에 어떤 집사님 한 분이 교회 어떤 분들과 사이가 안 좋으셨습니다. 그래서 상담이었지만 그 분의 억울함과 속상함들을 듣게 되었는데, 그 분의 말 중에서 좀 불편했던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 말은 “예수님께서는 결코 그러신 분이 아니다. 그 집사는 주님 말씀 안에서 맞지 않는 말과 행동만을 한다.”라는 것이었습니다. 도대체 예수님은 어떤 분이시기에 그 집사님하고만 친하고 다른 집사님들하고는 멀리하신다는 것인지요..
우리에게 있어서 예수님을 만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가치와 숨겨진 보화들에 대하여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장 훌륭한 기자는 인터뷰하는 사람의 가치를 잘 알고 남들이 알지못하는 그 부분을 인터뷰를 통해 알아내야 특종을 얻게 되는 것처럼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지고 계신, 세상이 알지 못하는 그 가치를 우리가 알고 누리는 특원을 가지게 될 수 있습니다.
그 가치는 무엇입니까?
갈라디아서 2:16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이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노력하지 않고 살아가지 않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이세상에 고난을 당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물 한잔을 먹어도 자신의 힘과 노력이 필요한 것이 바로 이 세상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 완벽한 사람이 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완벽한 사람이 되기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을 감수하고 고생을 하였는지 모릅니다. 어떨 때는 복종의 모습으로 어떤 때는 교만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였습니다. 금욕주의적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바리새인처럼 세속을 멀리하고 오직 하나님만을 섬긴다며 인간적 본능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하기 힘든 율법을 지키고 또 그 세부적 법례를 지키며 살기도 합니다. 한신교회 이윤재 목사님께서 이스라엘에서 유학하실 때 있으셨던 일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살 때 이윤재 목사님가정은 이방인이라서 동네에서 사시긴 해도 동네 유대인들과 대화하거나 친구로 지내기가 어려우셨다고 합니다. 같은 아파트에 살면서도 인사는 하지만 개인적으로 식사에 초대한다거나 하는 일이 드물었던 때 어느날 안식일인데 옆집사는 한 유대인이 목사님의 방문을 두드렸습니다. 문을 열어보니 옆집 사는 그 유대인은 아주 친절하게 웃으며 자신의 집으로 목사님을 인도하였습니다. 목사님은 기쁜 마음으로 따라갔고 그 집문을 지나고 거실을 지나고 다다른 곳은 바로 부엌이었습니다. 그 부엌에 한 스프냄비가 있었는데 계속 끓어서 거의 바닥이 보일 지경이었습니다. 그 때 유대인이 웃으면서 “당신은 이방인이니 이 가스불을 좀 꺼주시구려..”라고 말하였다고 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여러분 향어를 아십니까? 이스라엘 잉어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비늘없는 고기를 절대 먹어서는 안되는 율법에 따라 잉어와 비늘있는 유럽계물고기를 가져다가 계량시켜서 만들어 등쪽과 아가미쪽에 비늘이 크게 몇 개라도 붙어있게끔 만든 물고기가 바로 향어인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눈가리고 아웅하며 율법을 지킨다며 이 향어를 먹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율법의 행위로서는 도저히 하나님 앞에서 사람은 그 누구도 완벽해 질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 앞에 사람이 나가 그 축복을 받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을 믿는 자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오직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 그 한 가지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치 있는 이유! 그것은 바로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만들어주시는 그 능력이 있으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나 자신의 힘이 아니라 예수님은 자신을 믿어주고 순종하는 자들에게는 아낌없이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비밀과 축복을 보여주시고 누리게 해주신다는 데 더없는 귀중한 가치를 가지고 계십니다.
이 가치를 깨달은 우리는 어떻게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할까요? 이 두제자들과 같은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38절 함께 읽겠습니다.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라고 제자들은 예수님께 나아갔습니다. 왜 안드레와 요한이 예수님을 “랍비”라고 먼저 지칭하였을까요? 그것은 바로 먼저 그들 스스로 예수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어디든지 따르겠다고 하는 의지를 보여준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눈 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디 계시오니이까”라는 당시의 랍비에게 제자들이 겸손하게 가르침을 기다리는 관용문구를 사용한 것은 바로, 교만하게 “예수! 우리가 당신이 따를만한 자인지 아닌지 알아보겠소.”가 아니라, 낮은 제자의 겸손한 자세로 예수님의 말씀을 청종하겠다는 자세를 보여준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교회에 예배를 드리러 올 때마다 예수님 앞에서 취하는 우리의 행동은 어떻습니까? 교회 들어와서 처음 드리는 기도의 내용은 어떻습니까? “주님! 제가 이런이런 문제와 소원이 있어 왔습니다.
그러니 이 예배를 통하여 문제해결하여 주시옵소서”입니까? 아니면
“주님! 주님의 말씀을 들으러 왔습니다. 오늘 주의 뜻대로 저에게 복을 주시옵소서!”입니까?
“무엇을 구하느냐?”라는 예수님의 물음에 안드레와 요한은 “랍비여 어디계시오니까”라며 도리어 겸손하게 예수님의 뜻과 말씀을 들으려 했다는 점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랍비여 어디계시오니이까”라는 두 제자들의 말에 아마도 그 겸손한 자세로 인해 빙그레 만족스런 웃음을 지으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와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은 초청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께 초청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초청을 소망하는 마음도 가져야 합니다.
저는 간혹 신앙생활을 하면서 어려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꾸 제가 하나님께 조르면서 하나님의 기적과 복을 저의 때에 보여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간절한 마음의 기도가 간혹 자칫하면 교만의 기도로 바뀌어질 수 있는 아슬아슬함을 경험하곤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으면 사망에서 영생으로 옮겨지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게 되는 권세를 주신다고 약속하시고 지금 그것을 실천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각 개인에게 주어지는 구체적인 그 권세의 실현의 때와 방식은 오직 자신들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 그 주권은 바로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직 주님께 속하여지는 것을 모르고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하나님 앞에 갔다가 멀어졌다가 제멋대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적 초청을 받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우리 스스로에게 속하여 있는 것도 아니요,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께 속하여 있다는 어쩔 수 없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와보라”라는 주권적 초청이 이 순간 우리 열방교회 예배와 성도님들께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이것을 늘 소망하며 날마다의 삶 속에서 주인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권위있는 그리스도의 초청이 우리의 삶에 늘 나타나기를 간절히 바라며, 우리의 기도제목들과 신앙생활들이 온전히 주님의 뜻에 맞게 맞추어 가져서 늘 승리하는 삶이 되기를 또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우리의 주인되시며 모든 것되시는 주여!
우리의 기도는 단 한가지입니다. “와보라”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우리의 모든 삶의 문제, 죄악, 그리고 고난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하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주님 한 분 뿐입니다. 이를 통하여 우리의 인생이 영적으로 육적으로 풍성하여지고 그 풍성함을 좇아 주의 나라를 세워져 가는데 쓰이는 겸손한 일꾼되게 하여 주소서. 이 모든 말씀 주 예수님 이름 받들어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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