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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누리선교교회/한국어예배

에베소서 강해 4) 십자가로 이룬 화목 (수요예배 20130424)

by 온누리선교 2013. 4. 24.

에베소서 2:11~22

11.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5.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설교: 십자가로 이룬 화목

사도 바울은 유대인 기독교인들과 이방인 기독교인들이 사이의 장벽을 허물기 위해서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등, 많은 교회를 다니면서 구제품을 얻어다가 예루살렘 교회가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 적극적으로 도왔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와 이방 교회가 서로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해서 사도 바울이 수고한 것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가 되었느냐? 하나가 되기는 정말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이 와중에 사도바울이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13~17절의 말씀입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인간의 힘과 노력으로 하나 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하나 되게 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 2절에 “내가 세상의 다른 것을 알지 않기로 했다. 내가 세상의 다른 학문으로 하나가 되게 하는 일은 있을 수가 없다. 내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다른 것을 알지 않기로 결심했다.”면서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서는 “내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 라고 사도바울은 고백하였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서로 갈라져있는 우리들, 벽을 쌓고 남남이 된 우리들을 화평케 하는 방법은 십자가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성령의 역사가 어떤 장벽들을 제거하셨는지 하나하나 살펴보면서, 우리 안에 있는 영적 믿음의 성장을 가로막는 장벽들을 제거하시는 귀한 은혜의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첫째는 바울이 선교하던 그 당시 사회는 유대인과 이방인이라고 하는 이 두 관계는 절대로 접근할 수 없는 막힌 담이 있었습니다. 이 장벽은 성경말씀 가운데도 수십 군데 아주 잘 반영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들은 서로 결혼도 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서로 장사도 같이 안합니다. 밥도 같이 먹지 않습니다. 같은 자리에 앉지도 않습니다. 말도 하지 않습니다. 어쩌다가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이 하나님께 예배드리러 성전을 찾아오면 예배드리는 성전에서마저 이방인은 들어오지 못하게 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이방인의 뜰'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마치 "저 주차장에서 예배드리고 가라!" 라고 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이 예루살렘 성전은 큰 담장으로 사방으로 둘러쌓여 있는데, 담장 둘레에는 유대인들이, 그것도 제사장들이 칼을 들고 이방인의 접근을 막고 있었습니다. 이런 장벽이 바로 유대 사회에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있었습니다.

둘째는 같은 유대인 중에서도 또 다른 장벽이 가로막혀 있습니다. 지역적 장벽입니다. 사마리아 여자에게 예수님이 물을 좀 달라고 하신 기록이 있습니다. 그때 그 여자가 하는 말이 "당신은 유대인 남자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을 달라고 합니까?" 같은 유대 안에서도 지역적 장벽이 이렇게 높이 쌓여 있습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차이는 무엇인가? 같은 유대인이면서도 차별대우 받는 유대인들을 사마리아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역사적으로 너희들은 혼혈아다. 혹은 혼합종교인들이다!"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별 차이가 없는 차이를 그렇게 높은 장벽으로 쌓고 피차 말도 하지 아니하고, 유대 나라 사람들은 갈릴리 지방으로 가거나 갈릴리 지방에서 유대 나라로 올 때는 사마리아 땅을 밟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먼 거리를 빙 돌아서 '저 더러운 땅은 밟지도 말아야 된다!' 그렇게 생각을 했기 때문에 이 같은 유대인 사회에서 이렇게 무서운 장벽이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셋째는 할례당과 무할례당의 종교적 장벽이 또 무한히 높은 장벽으로 쌓여져 있었습니다. 이 문제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설교한 내용을 보면, 할례를 받은 사람과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의 차이와 장벽이 얼마나 컸던 것을 아주 잘 반영해 주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6절에 보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 역사 하는 믿음뿐이니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말들이 계속 나오는 이유는 그 장벽이 그 사회에서 그렇게 컸습니다. 이방인과 유대인의 장벽, 할례자와 무할례자의 장벽, 같은 지역 안에서도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장벽… 온통 장벽으로 가득 차있습니다.

넷째는 의인과 죄인의 장벽이 있었습니다. 그 사회에서는 그들이 말하는 죄인의 기준이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그 사회에서 아주 왕따로 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사람들이 그것을 보자마자 비난합니다. "저가 죄인의 집에 들어갔도다." 그 사람들은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의인이라고 하는 사람이, 선지자라고 말하는 사람이 저렇게 죄인의 집에 함부로 들어가서 무엇을 함께 우줄우줄 먹고 앉아서 저 모양을 하는가?" 라고 비난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별명이 "세리와 죄인의 친구" 이었습니다. 아주 철저한 흑백 논리의 철학으로 죄인과 의인의 담을 쌓고 오고가지 않은 막힌 담의 사회! "너는 죄인이고 나는 의인이다." 실은 자기는 더 큰 죄인이면서 그렇게 담을 쌓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회에서 누구도 상대해 주지 아니하는 이런 멸시 받는 자들을 인간대우 해주셨기 때문에 그런 비난을 계속 받으셨습니다.

다섯째는 남자와 여자의 장벽이 있었습니다. 유대 나라는 성차별이 어찌나 심했는지 여자는 사람 숫자에서 제외한 게 성경에서도 나오지 않습니다. "여자와 아이 외에 몇 명"이라고 하는 말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 사회인들에게 막달라 마리아나, 사마리아 여인들 등, 많은 여자들의 인격을 대우했기 때문에 비난의 대상이 된 겁니다. 그래서 초대교회가 핍박을 받을 때, 이유 중 하나가 여자의 인권을 인정하여주는 것 자체가 사회물의를 일으키는 것이었습니다. 과거 그리스로마문화권에서는 여자는 태어나서 죽임을 당하거나, 노예가 되거나, 아니면, 신전의 여사제가 되어 창녀노릇을 하거나,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면 정략적인 목적으로 지참금을 위해 자유 없이 살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사회에서 여자들의 자유는 없었고, 남자들과의 장벽은 너무나도 높았습니다.

여섯째는 어른과 아이들의 장벽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과 제자들의 사이가 불편해졌습니다. 문제의 발단은 어린이들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린아이들이 예수님께 다가오는 것을 제자들이 심하게 꾸짖었기 때문에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예수님이 그런데 그 장벽을 헐어버리십니다. "어린 아이 하나를 가운데 세우시고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 어린 아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어린이 멸시 문화가 유대사회에 존재했습니다. 이 모든 장벽을 예수님께서 하나씩 하나씩 막힌 담을 허셨습니다.

일곱째는 힘을 가진 로마와 힘이 빠진 식민지의 장벽이 또 있습니다. 이 장벽도 얼마나 큰지 성경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같은 유대인 혈통 중에서도 헬라파 유대인과 히브리파 유대인의 장벽이 있어서 사도행전 6장에 그들이 싸움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심지어는 건강한 사람과 건강치 못한 사람의 장벽! 그래서 문둥병 환자들은 격리 수용했고 저주받은 백성이라고 규정해 버렸습니다. 아주 갈래갈래 찢어진 만신창의 공동체! 건드리기만 하면 벌떼처럼 일어나고 모래성 같이 무너질 조직체, 그게 유대 나라, 유대 사회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사회에 태어나셔서 이 모든 담을 헐어버리시고, 하나님 소속으로 만들어버리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갈라짐과 나뉘어진 사람들은 예수님의 희생과 사랑으로 하나 되어, 하나님 아래,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러한 인간의 삶, 서로 갈등하고, 반목하고, 서로 담을 쌓고 이런 인간의 삶 속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평화와 행복이 어디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느냐? 16절 말씀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즉, 사도 바울은 십자가 밖에는 없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십자가 앞에 서게 되면 예수님께서 내 죄 때문에 달려있는 것이 보이고, 내 죄 때문에 희생당하신 예수님이 보입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저 어린 양을 보라.” 지금까지는 십자가가 무슨 의미인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오늘 내가 십자가에서 내 죄를 깨닫고 보니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바로 내 죄 때문에 고난 받은 것입니다. 그가 찔림은 내 허물을 인함이고 그가 상함은 내 죄악을 인함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친히 우리의 구원을 위해 댓가를 치루신 것입니다. 우리를 살리실 모퉁이돌이 되신 것입니다.

18~22절의 말씀입니다.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이제 이방인인 에베소 성도들은 이방인도 아니요, 손님도 아니요,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요 가족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해서 일어나게 되었다고 합니까? 사도바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이제는 멀리 있던 너희가 하나님과 가까워졌다고 말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된 우리가 이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것으로 결론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다고 만족할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데까지 가야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만으로는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으려면 성령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16절에서 십자가에 대해서 말하고 바로 18절에 이어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성령님은 십자가를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영이기 때문입니다.

이완주 장로님께서 인도를 종종 가시는데 항상 비자문제 때문에 어려움을 겪습니다. 관광비자로 가자니, 종교포교활동을 금지하는 인도정부가 의심할 것 같고, 그래서 비자발급이 어려워지고.. 어려가지 문제로 인하여 인도에서 선교하는 일이 힘듭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인도 영주권을 얻거나, 비즈니스비자를 발급하여 암암리에 선교사역을 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서 살던 우리들은 반드시 하나님계시는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살아야 진정으로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단이 우리의 영혼을 죄악된 세상에 붙잡아 놓고, 하늘나라에서 거주하는 것을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유혹과 죄의 담을 만들어서 우리의 힘으로는 넘어설 수 없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하여, 하늘나라 밖에 살고 있던 우리에게 십자가는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주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로 말미암아 하늘나라에서 추방당하지 않고 살게 되었습니다.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로 이제부터 우리는 비자나 여권을 갱신하지 않고 계속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큰 축복은 십자가를 통하여 내리시는 성령의 축복입니다. 성령이 주시는 축복은 그저 백성이나 시민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속, 가족이 되는 축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렇게 하늘나라의 시민이 될 뿐 아니라, 하늘나라의 가족이 되는 데에 이르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은혜가 충만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십자가의 은혜를 알게 하시고, 이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 품 안에서 살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용납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어서 우리스스로 분열할 수밖에 없는 우리들을 사랑으로 덮으셔서 성령충만함으로 하나되게 하시고, 하나님의 소속으로 만들어 주시니 또한 감사드립니다. 말씀을 듣고 우리 스스로가 하나님의 아들, 딸로 사는데 자부심을 가지고 살게 하시고, 어떠한 죄와 분열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지켜 주시옵소서. 주님께서 늘 함께 하여주실 것을 믿사오며 이모든 말씀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