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사도행전 26: 1~7
1.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너를 위하여 말하기를 네게 허락하노라 하니 이에 바울이 손을 들어 변명하되
2.아그립바 왕이여 유대인이 고발하는 모든 일을 오늘 당신 앞에서 변명하게 된 것을 다행히 여기나이다
3.특히 당신이 유대인의 모든 풍속과 문제를 아심이니이다 그러므로 내 말을 너그러이 들으시기를 바라나이다
4.내가 처음부터 내 민족과 더불어 예루살렘에서 젊었을 때 생활한 상황을 유대인이 다 아는 바라
5.일찍부터 나를 알았으니 그들이 증언하려 하면 내가 우리 종교의 가장 엄한 파를 따라 바리새인의 생활을 하였다고 할 것이라
6.이제도 여기 서서 심문 받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까닭이니
7.이 약속은 우리 열두 지파가 밤낮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받들어 섬김으로 얻기를 바라는 바인데 아그립바 왕이여 이 소망으로 말미암아 내가 유대인들에게 고소를 당하는 것이니이다
설교: 복음의 기회를 잡는 바울
디모데 후서 4:2말씀에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항상 힘쓰라 (중략)"이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 구절이 참으로 맞는 말이지만, 또한 많이 우리에게 부담스러운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부담감을 이기고 이 말씀에 순종해야합니다. 왜 그리해야 하는지 이야기 하나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6.25 전쟁 때 이야기 입니다. 한 북한 인민군 장교의 부인이 독실한 기독교신자였습니다. 그 인민군 장교는 기독교가 몹시 못마땅해 기독교인 아내를 핍박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내가 기독교인이라는 것이 알려지면 그의 안전에도 큰 위험이 있으므로 아내에게 제발 예수를 믿지 말라고 사정도 해보고 협박도 해보았으나, 그 아내는 더욱 열심히 믿고 남편을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남편이 잠들 땐 그의 손을 잡고 "내 주를 가까이 하려함은"하며 찬송을 불렀습니다. 전쟁이 나고 남편도 전쟁터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결국 포로가 되었고, 포로수용소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 때 갑자기 한 미군 군목이 와서 기독교 신자가 있으면 나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증거로 찬송가를 부르게 했습니다. 이 때 장교는 갑자기 매일밤 아내가 불러주던 찬송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살고자 하는 마음에 이 찬송가를 불렀는데, 부르는 와중에 자신도 모르게 감동을 받아 그 자리에서 주님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나올 수 있게 되었답니다. 이렇게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이렇게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간에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말씀을 전한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사도 바울입니다. 지금 죽을 위기인데도 자신을 변호하기는 커녕 복음을 전할 기회를 얻었다고 기뻐하면서 아그립바 앞에서 말하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바울의 모습을 통해 주님께서 주시는 음성을 들으시고 그 안에서 넘치는 은혜받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3절입니다.
1.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너를 위하여 말하기를 네게 허락하노라 하니 이에 바울이 손을 들어 변명하되
2.아그립바 왕이여 유대인이 고발하는 모든 일을 오늘 당신 앞에서 변명하게 된 것을 다행히 여기나이다
3.특히 당신이 유대인의 모든 풍속과 문제를 아심이니이다 그러므로 내 말을 너그러이 들으시기를 바라나이다
사람은 언제든지 자기를 변명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또 변명할 기회가 주어지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그런 기회가 주어졌을 때 어떻게 사용하십니까? 물론 그런 기회는 자기를 변명할 수 있는 기회로 100% 활용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여기에 보면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럴 기회가 주어졌지만 스스로 자신을 위해서 변명하지 않고 그 기회를 100% 주님을 전도하는 기회로 사용했습니다.
1절에 '이에 바울이 손을 들어 변명하되'라고 쓴 것을 보니, 사도 바울은 자신을 위한 변론의 기회가 주어지자 조금도 주저함 없이 당당하게 '손을 들어' 자신의 입장을 정리해 나갔습니다. 여기서 '손을 들었다'는 것은 자신의 말이 진실하다는 뜻을 보인 것입니다. 흔히 성도의 자기 고백을 '간증'이라고 합니다. 간증은 자신이 경험한 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 주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이어야 하고, 조금의 거짓도 없어야 하고, 다른 사람이 들어도 객관적으로 맞다는 생각이 들어야 합니다.
바울은 바로 그러한 간증을 아그립바 앞에서 한 셈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의 변명을 듣고 아그립바를 비롯한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무죄를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의 진실된 고백이 모든 사람을 크게 감동시킨 것입니다. 이처럼 진실은 바위 같은 마음이라도 녹이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의 능력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진실해야 합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바울은 확신에 차서 아그립바에게 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2절을 보니, “유대인이 고발하는 모든 일을 오늘 당신 앞에서 변명하게 된 것을 다행히 여기나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바울은 자신에게 변명할 기회가 주어진 것을 '다행히' 여긴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그가 매우 당당하고도 확신에 찬 모습으로 고백에 임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내용입니다. 바울은 유대인의 비난이나 정죄에 아랑곳하지 아니했습니다. 하나도 거리낄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먼저 아그립바에게 예의를 갖추었습니다. 아그립바는 이방인으로서는 드물게 유대의 학문과 종교적 관습에 정통한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아그립바에게 자신의 입장과 처지를 변호할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에 대해 기쁘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성도는 신앙인이 아니면서도 기독교에 대해 호의적인 사람들에게 바울과같은 선교적 입장을 가져야 합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세상은 거부나 수용의 대상이 아니라 오직 선교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에 늘 주눅 들 필요가 없습니다. 늘 당당히 복음을 들고 세상에 대하여 선포할 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복음을 선포할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3절에 바울은 “내 말을 너그러이 들으시기를 바라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너그럽게 들어 달라'는 말은 끝까지 들어 달라는 뜻입니다. 이런 기회가 주어졌을 때 사도 바울의 가슴은 불타올랐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 자신을 변명할 기회가 생긴 것이 아니라, 이제 또 한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에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는 쪽 보다는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쪽을 택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사도 바울의 지식은 유대문화 뿐 아니라 로마의 학문까지도 꿰뚫고 있습니다. 자신하나 법정에 서서 논쟁하면서 구하고 남는 실력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자신의 모습은 뒤로 숨기고 어떻게 하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드러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나타나도록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4~5절입니다.
4.내가 처음부터 내 민족과 더불어 예루살렘에서 젊었을 때 생활한 상황을 유대인이 다 아는 바라
5.일찍부터 나를 알았으니 그들이 증언하려 하면 내가 우리 종교의 가장 엄한 파를 따라 바리새인의 생활을 하였다고 할 것이라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젊었을 때 엄격한 율법 훈련을 받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가말리엘 학파에서 훈련을 받았고 엄격한 바리새인의 훈련을 받았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지금도 까만 옷을 입고 엄격한 훈련을 받습니다. 그런데 같은 유대인들에게 고소를 당해서 재판을 받고 있는 데 그것은 한 소망 때문에,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한 소망 때문에 이렇게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재판을 받는 이유는 한 가지 문제 때문인데 한 가지 문제는 유대인들에게도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한 소망, 바로 메시야 대망 사상인 것입니다. 메시야를 기다렸던 것입니다. 유대인들과 사도 바울의 한 소망인 메시야를 기다려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셨고 12지파가 간절히 밤낮으로 소망했었습니다.
그렇다면, 한 소망을 가졌음에도 서로가 갈등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바로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그럼, 이 예수가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가 믿는 예수가 메시야냐. 구약에서 약속하신 소망이신 메시야냐. 유대인들은 그것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음에 이어서 말합니다. 6~7절입니다.
6.이제도 여기 서서 심문 받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까닭이니
7.이 약속은 우리 열두 지파가 밤낮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받들어 섬김으로 얻기를 바라는 바인데 아그립바 왕이여 이 소망으로 말미암아 내가 유대인들에게 고소를 당하는 것이니이다
여기서 자신의 신앙에 대해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 신앙 (6절)이고 둘째로, 하나님나라에 소망을 둔 신앙(7절)이었습니다. 그러하면 어떻게 해서 이러한 신앙을 가지게 되었냐면, 바로 과거 잘못된 신앙에서 벗어나 예수를 만나서 그 분이 메시야, 그리스도인 것을 알고 영접하여 이제는 새로운 소망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인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바로 하나님을 받드는 하나님의 백성만이 갈 수 있는 나라이고, 메시야를 통해서 온전히 이루어질 수 있는 나라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러한 '약속과 소망'을 전하지 아니하고는 견딜 수 없는 사명감으로 이 자리에 섰노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전통적인 바리새인으로 살았으면 이처럼 고생도 하지 않아도 됩니다. 계속 편안하게 자신이 속해있던 조직의 방식대로 그대로 세상에서 하나님 제일 최고로 섬긴다하면서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 난후 그가 잘못된 생활을 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지금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과 믿음을 전파하다가 오해로 억울하게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바울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알게 됩니까? 올바른 믿음은 타협이 아니라 복음전파입니다. 바른 것을 알리는 것입니다. 진리를 전파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올림픽의 꽃이라고 일컬어지는 마라톤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아십니까? 1만 기병의 헬라군대와 11만 대군의 페르시아 군대와의 전쟁이 있었습니다. 마라톤이라 불리는 벌판에서 헬라의용사들이 페르시아 군대를 싸워서 이겼습니다. 이 기쁜 소식을 전령 페이디 페데스가 25마일을 달려 아덴 시민에게 전하고 쓰러져 숨졌습니다. 그 25마일은 한동안 42.195km로 마라톤 코스가 정해질 때까지의 거리였습니다.
마라톤이 얼마나 외롭습니까? 괴롭습니까? 힘듭니까? 그러나 마라토너들은 결코 포기 하지 않고 그 기다란 코스를 달려서 메인스테디움의 결승전에 들어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새생명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저 천국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그 길에서 말입니다. 그러기에 결코 포기 할 수 없습니다. 끝까지 달려가야하는 것입니다. 외롭고 힘들지라도 말입니다. 그러나 마라토너와는 좀 다릅니다. 우리에게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고 계시고 성령께서 우리를 도우십니다. 오늘 바울이 끝까지 복음을 위해 사는 것을 보면서 우리도 복음을 위해 날마다 힘써 살아가게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은혜로우신 주님~!
우리에게 복음의 가치를 알게 하시고 복음을 전할 기회를 늘 갖게 하시려는데 우리가 영적으로 게을러서 성실히 주님의 일을 하지 못한 것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늘 함께 하시고 힘주셔서 복음의 달려갈 길을 다 갈 수 있도록 하옵소서! 이 모든 말씀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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