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요한복음 17장 1~5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설교: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어느 날 하루살이와 메뚜기가 함께 놀았습니다. 저녁 무렵이 되었을 때 메뚜기가 하루살이에게 "오늘은 그만 놀고 내일 만나자."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하루살이가 물었습니다. "내일이 뭔데?" "캄캄한 밤이 지나면 밝은 날이 오는데 그게 내일이야." 하루살이는 메뚜기의 이 말을 듣고도 이해를 하지 못했습니다. 이 메뚜기는 어느 날 개구리와 함께 놀았습니다. 개구리는 "날씨가 추워지니 그만 놀고 내년에 만나자." 그러자 메뚜기가 물었습니다. "내년이 뭔데?" "내년은 겨울이 끝난 후에 날이 따뜻해지려고 할 때 오는 거야." 그러나 개구리의 말을 도통 메뚜기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루살이입니까? 메뚜기입니까?
우리는 하루 지나면 다른 하루가 오고, 올해 지나면 내년이 오고, 이 땅에 살다가 죽으면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사는 것을 압니다. 어떻게 압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받으시고,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시는 그 축복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1절의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예수님께서는 이제 십자가 고난을 앞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과 작별의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마음에 담아 두었던 말들을 쏟아내셨습니다. 그래서 1절에서 “이 말씀을 하시고”라는 말은 요한복음 16장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마지막 당부한 것은 예수께서 세상을 떠나고 나면 핍박이 온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시겠다는 약속과 더불어 요 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위쪽을 바라보십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이러한 자세와 행동을 면밀히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눈을 돌리십니다.
우리가 마지막 바라볼 곳은 하늘입니다. 그 하늘에는 아버지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던 기도처럼 예수님 역시 “아버지여”하시면서 하나님을 부르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하셨던 일은 바로 기도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도대체 무슨 때가 임하였다는 것입니까? 이 기도는 예수님께서 원수들에게 붙잡혀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될 것을 앞두고 드린, 매우 긴박한 상황에서의 기도입니다.
“아버지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사람은 죽을 때가 되면 살면서 그 사람이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는지 드러납니다. 바로 예수님은 죽음을 앞두고 오직 아버지의 영광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아버지와 아들을 영화롭게 할 수 있을까요?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당시 예수님께서 유대사람들 뿐 아니라 이방인들까지 장정만 오천명 칠천명 모일 정도로 인기가 있었으니, 새로운 권력을 잡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진정한 영광은 그런 세속적인 것에 있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사랑하셔서 자신을 보내고 이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서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서 죽음을 감당하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그것만이 자신과 아버지에게 영광되는 길임을, 영화롭게 하는 것임을 아셨습니다.
이 ‘십자가 영광’을 위해 고난의 길을 가는 이유를 2절에서 말씀하십니다. 2절의 말씀입니다.
2.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하나님 아버지는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실 때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가지고 오셨습니다. 원문으로 직역하면 pavsh” sarkov”(파세스 사르코스) ‘모든 육체’를 말합니다. 모든 인류는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들입니다. 이 땅에 살아가는 모든 사람입니다. 한 사람도 예외가 없습니다. 요 3:36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날에 인류를 심판하는 권세를 가지고 계십니다(요 5:27).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은 이미 십자가의 죽음은 패한 것이 아니라 승리와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미 이 영광을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실제로 있었던 복음의 이야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호주 가까이 있는 뉴 헤불리지스 제도에 있는 30개 섬의 이야기입니다. 백인이 들어가 본 적이 한번도 없었던 이 지역에 영국선교사이며 학자인 죤 월리암즈가 1839년11월 20일에 처음으로 상륙했습니다. 그러나 상륙한 즉시 해변에서 살해되었습니다.
둘째로 해리스 목사가 들어갔습니다. 그도 3일이 안되어 학살되었습니다. 셋째로 죤 골든 내외가 들어가 원주민과 사귀는데 겨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그도 역시 오래 견디지 못하고 백인을 증오하는 토인에게 살해되었습니다. 그후 맥네어 선교사가 도전했습니다. 그도 결국 1년도 못되어 암살되었습니다. 다섯 번째로 상륙한 사람은 수년 전에 순교한 죤 골든의 동생이었습니다. 골든 목사는 가까스로 받아들여져 현지의 언어를 연구하고 신약성경 번역을 착수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괴한이 그의 서재에 침입했습니다. 그는 도끼로 처참하게 타살되었습니다. 그의 피가 마침 번역하고 있던 사도행전 7장, 즉 스데반이 순교한 장면의 원고를 적셨다고 합니다. 그후 일곱째 선교사인 로버트슨 목사가 상륙했습니다. 비로소 로버트슨 목사에 의해서 30개 섬에 있는 전 주민이 기독교인이 되는 놀라운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사람이 보기에는 계속해서 실패하는 선교의 역사가 되풀이되는 듯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미리 그 결과를 내다보시고 계속해서 수확이 이루어지도록 복음의 씨앗을 뿌렸습니다. 하나님의 계획하심은 놀랍습니다. 철저히 헌신된 사람들을 보내시고 이 사람들을 통해서 희망 없어 보이는 사람들이 예수 믿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선교의 열매를 거두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죽기를 작정한자는 영원한 생명으로 다시 태어납니다(요 12:25). 십자가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확실하게 말했습니다. 3절입니다.
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십자가의 죽음 뒤에는 부활과 영생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것을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영생은 하나뿐이신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님을 아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는 것’ 참으로 중요합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부르짖기를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알자”(호 6:3)고 했습니다. 예레미야는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줄 깨닫는 것이라”(렘 9:24)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면, 예수님을 모르면 영생이 없습니다. “아는 것이니이다”의 ‘안다’는 ginwvskw(기노스코)라는 말로 체험적인 지식을 의미합니다. 다른 지식은 체험을 통해서 알게된다는 것은 이해되지만 하나님과 예수님을 아는 것에 어떻게 체험적인 지식을 얻을 수 있습니까?
그것은 성령을 받아 알게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요 3:5절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성령으로 나자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님을 아는 것은 성령의 역사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우리를 위해 아버지 하나님은 아들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세상에 보내셨고 영생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이 믿어지십니까? 그것이 참으로 내 안에 느껴지십니까?
한신교회에서 사역할 때에 부교역자들은 항상 성찬식때 배병배잔을 맡았었습니다. 성도들이 많아서 일사분란하게 배병배잔을 해야하게했기 때문에 전투를 방불케 할만큼 긴장도 하고 빠르게 움직여야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성찬식날, 그날도 변함없이 담임목사님께서 집례를 하시는데, “이것은 너희를 위해 흘리는 피다”라는 대목에서 갑자기 가슴에 찌릿한 묵직함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십자가의 예수님이 느껴지면서 나를 위해 흘리신 그 피, 보혈에 절절히 가슴이 뭉클해지고 동시에 감사함이 넘치게 되었습니다. 배잔을 하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나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로, 고개를 푹숙이며, 성도들 하나하나에게 잔을 돌렸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이 성령님을 통하여 제 영혼을 울린 잊지못할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이고, 무슨 일이 있어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잘 기억해야 합니다. 4~5절 말씀입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어야 하나님 앞으로 많은 사람들이 와서 하나님께 감사할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다시는 하나님 떠나지 않고 하나님과 함께 살겠다고 하나님만을 기쁘게 해드리겠다고 할 것을 알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방탄 소년단을 알고 있습니까? 한국에서 제일 유명한 아이돌입니다. 우리 주일학교 아이들도 “불타오르네~~”를 부르며 춤을 춥니다. 그러나 이 아이돌들이 처음부터 유명했던 것은 아닙니다. 물론 이 아이돌들이 실력이 있고 유명해질만한 재주들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이 아이돌들이 자신들의 젊음을 바치고 시간을 투자하고 노력을 했습니다. 거의 죽기살기로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 둘 팬들이 생기고, 이 팬들이 이런 아이돌들의 모습을 보고 매일매일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좋아하는 남자 아이돌 하나씩 사진들을 사들이고, 노래를 듣고, 어디 콘서트 있으면 미친 듯이 쫒아갑니다. 이 아이돌을 보고 환호합니다. 정신이 없습니다. 대단하다고 합니다. 온통 관심이 이 아이돌 뿐입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한 아이돌이 온맘 온 정성 죽기살기로 노래하고 춤추는데도 ‘잘한다~ 부럽다~’하며 칭찬하고 좋아하고 인기의 자리에 놓는데,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아이돌처럼 자신의 영광을 구하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뜻대로 행동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말씀을 하실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가리켜 ‘영광’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을 위해서이고, 바로 우리 인간들을 위해서였습니다. 우리가 새생명을 얻어서 하나님과 가깝고 늘 함께 살게 되면 하나님은 영광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놀라운 비밀이 있습니다. 그 당시 사람이 볼 때 예수님께서 달리신 십자가는 저주의 십자가였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영광이었습니다. 이 영광 가운데 우리가 얻은 것은 하나님의 품안에서 영원히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정확히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을 알게 되었습니다. 바로 “하나뿐이신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님을 아는 것”입니다. 알아야 무언가를 합니다. 알아야 무언가를 얻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복된 말씀 잊지 마시고, 이 사순절 기간 영원한 생명 주심에 감사하면서 우리의 모든 더러운 죄, 갈등, 두려움을 버리시고 영광의 하나님께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살아계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바로 주 예수님께서 달리신 그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그 누가 저주를 축복으로, 죽음을 생명으로 바꿀 수 있겠습니까? 당신께서 보내시고, 당신의 독생자인 예수님께서만이 그리하실 수 있습니다. 날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십자가의 영광이 우리 삶에 나타나기를 애쓰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우리의 고통이 기쁨으로, 우리의 고난이 행복으로 변하는 일이 나타나게 하옵소서. 이 모든 말씀 귀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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