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베드로후서 2: 20-22
20. 만일 그들이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21.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그들에게 나으니라
22. 참된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그들에게 응하였도다
설교: 거짓 교사들의 운명
독수리 알 하나가 굴러서 닭 농장으로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독수리 알을 달걀로 착각한 늙은 암탉은 독수리 새끼도 자기 새끼인 줄 알고 기르기 시작했고, 이 독수리도 자기가 닭인 줄 알고 성장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새끼 독수리가 문득 하늘을 나는 독수리를 보았습니다. 부러운 생각이 들어 “나도 저렇게 날 수 있을까?”라며 탄식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닭들이 말했습니다. “저기 하늘을 나는 멋진 새는 독수리고 너는 닭이야. 닭 중에서도 덩치가 크고 못생긴 닭이지. 그렇기 때문에 너는 결코 하늘을 날 수 없어.” 다른 닭들의 핀잔을 들은 새끼 독수리는 결국 자기가 평생 닭인 줄 알고 살다가 달걀도 하나 못 낳아보고 죽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성도들은 닭이 아닙니다. 우리는 독수리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날개, 기도의 날개, 용기의 날개를 펼쳐야 합니다. 힘이 없어 떨어진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망하거나 죽지 않습니다. 어느 순간에 전능하신 하나님의 날개 위에 업혀서 다시 하늘을 나는 기적을 체험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후서 2장에서 베드로는 종교를 밀거래하지만, 진정한 신앙은 없는 거짓 선지자들과 거짓 선생들에 대하여 적나라하게 묘사합니다.
그들은 지략이 뛰어나고 진실하게 보이지만, 사실 머리는 텅 비어 있고 허위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들은 해답과 소망을 준다고 주장하지만, 거짓말과 절망을 불러옵니다. 그들은 신뢰할 만한 지식을 선포하는 척하지만, 신자들과 같은 언어, 다른 사전을 사용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얻은 듯이 행동하지만, 썩어질 것들에 사로잡혀서 다른 사람들을 사로잡을 방법을 모색합니다. 그들은 성공하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사실 장차 올 진노의 날에 받을 심판을 쌓아 올리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그리스도를 통한 은혜와 사랑을 경험한 후에 그 길에서 돌이켜 자신이 원하는 길로 가버린 거짓 선지자들과 거짓 교사들의 운명에 주목합니다.
20절입니다.
20 만일 그들이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베드로는 얼핏 보기에는 진짜 같은데 실제로는 진짜 지폐 속에 섞여 있는 위조지폐 같은 거짓 선지자들과 거짓 선생들의 운명에 대해 말합니다. 그들은 잠깐은 진정한 그리스도인 것처럼 행세할 수 있지만, 결국에는 말과 행실에서 정체가 드러납니다.
베드로는 그들이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고 말합니다. 또 그들이 ‘세상의 더러움을 피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진리를 머리로는 알지만, 그 진리로 마음과 몸이 변화되지는 않았습니다. 결국 그들은 진리를 듣지 못한 사람들보다 형편이 더 나빠졌습니다. 그들이 진리를 알고도 고의로 다른 길을 택하였다는 것은, 최선의 것을 알면서도 최악의 것을 일부러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행해야 할 일을 충분히 인식하였음에도 죄를 범한 것입니다. 따라서 진리에 관한 지식이 그들 자신에게 정죄가 되었습니다.
계속해서 베드로는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귀신 들린 사람의 운명을 반영합니다. 예수님의 비유(마 12:43-45)에서 귀신 하나가 나갔으나 결국 귀신 일곱이 들어가서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된 사람의 모습이 바로 거짓 선지자들과 거짓 선생들의 최후입니다.
우리는 진짜 그리스도인입니까? 아니면 그리스도인처럼 행세하는 가짜 그리스도인입니까? 거룩한 척, 경건한 척하면서 자신과 남을 속이며 살지 말고,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함으로 최선의 것을 선택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21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ᅟᅡᆮ.
21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그들에게 나으니라
베드로는 거짓 선지자들과 거짓 교사들이 진리를 알고도 의도적으로 진리를 배반하는 것보다 진리를 처음부터 알지 못했던 것이 더 좋았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베드로는 이 둘 사이를 비교하는 것이지, 이 둘을 선택 사항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무지가 배교보다 낫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진리를 모르는 사람은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지만, 진리를 거부한 사람은 바로 잡거나 변화시킬 수 있는 여지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이미 경험해봐서 안다고 생각하고 교만하게 행동합니다.
또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기 어렵지만, 자신이 진리를 다 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은 정말 자신이 다 아는 듯이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나쁜 영향을 미치고, 그들을 끝내 잘못된 길로 인도합니다. 예수님의 비유처럼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눅 6:39).
초대교회에서 배교는 특별히 끔찍한 죄로 간주 되었습니다. 즉 세례를 받고 나서 믿음을 버리고 돌아서는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짓는 것에 해당한다고 보았습니다. 배교는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다시는 하나님께 되돌아오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경험하고, 하나님께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진리를 처음부터 알지 못한 것이 더 나을 수 있다는 충격적인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짓교사들의 운명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22절의 말씀입니다.
22 참된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그들에게 응하였도다]
앞서 거짓 선지자들과 거짓 선생들을 ‘이성 없는 짐승(벧후 2:12)’이라고 묘사했던 베드로는 이제 그들을 개나 돼지에 비유합니다. 베드로 시대에 개는 떼지어 다니는 불결하고 포악한 야생 동물로 여겨졌습니다. 오늘날 많은 가정에서 키우는 애완동물과는 거리가 멉니다. 또 돼지는 율법에서 부정한 짐승으로 여겼습니다.
베드로는 잠언 26장 11절을 인용하면서 진리에 등을 돌린 거짓 선지자들과 거짓 선생들은 자신이 토한 것을 다시 먹는 개와 같은 자라고 말합니다. 또 그는 그들을 방금 몸을 씻고도 진흙탕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다시 그곳에서 뒹구는 돼지 같은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이 자기 안에서 무엇을 토해내었든 혹은 자기 밖에서 무엇을 씻어냈든 간에 근본적으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는 피땀 흘려 기도하신 후에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구원을 이루신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에 보답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혹시 개, 돼지와 같이 자신이 토하였던 것과 자신이 빠져나온 더러운 구덩이에 다시 돌아간 것은 아닙니까? 겟세마네 동산의 예수님을 기억하며 아름답고 견고한 영적 성숙을 이루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오늘 말씀을 통해 잘못된 신앙에 빠진 사람은 차라리 예수를 믿지 않은 사람보다도 더 불행한 사람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거짓 선생들과 이단에 넘어가게 되면 겉으로는 예수님을 믿지만 실제로는 그들의 교주를 믿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과는 그 어떠한 인격적인 교제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러니, 이전의 죄악된 행위들을 회개하고 눈물로써 자신의 신앙을 고백한다고 할지라도 정작 그들의 삶에서는 어떠한 믿음의 흔적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성경 말씀을 줄줄 외우고, 복음 전도에도 힘쓰고, 교회 생활에도 열심이지만, 그러나 그들의 삶에는 진정한 섬김과 겸손이 전혀 없습니다.
오직 자신의 목적을 이룰 수단으로써 겸손이 있고 섬김이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참 예수의 사랑을 모르기에 자신의 더 큰 이익을 따라 생명의 길을 버리고 다시 멸망의 삶으로 돌아가기를 반복합니다.
신앙은 단지 자신이 복 받고 구원받기 위한 수단일 뿐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러한 사람들의 비참한 상태를 가리켜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그들에게 응하였도다” 라고 말씀합니다.
이들의 어리석음에 대한 적절한 비유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짓 선생들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서 믿음에 대한 분명한 이해와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은혜, 성령의 권능, 그리고 나의 사명에 대한 ‘에피그노시스’, ‘실질적으로 삶에 녹아져 있는 앎’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날마다 이 앎을 유지하기 위해 경건에 힘써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경건하지 못한 이유는 우리가 연약해서도 무지해서도 아닌 경건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 59:1-2에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경건에의 연습에 힘써야 함을 결단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떠한 유혹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당당한 믿음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오늘 성경말씀을 통해 우리는 이 시대에 우리가 경계해야 할 거짓 교사와 거짓 가르침에 대한 교훈을 줌과 동시에 우리 자신은 어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돌아보게 합니다.
우리는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들에게 속아서는 안 되며, 정신을 차리고 깨어서 그들을 분별해야 합니다. 우리는 내 귀와 마음을 흡족하게 하는 거짓 교훈에 마음을 두어서는 안 되며, 참 진리이신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는 진짜 지폐 속에 섞여 있는 위조지폐같이 자신과 남을 속여서는 안 되며, 진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개, 돼지와 같이 옛 생활의 더러움으로 회귀해서는 안 되며, 날마다 아름답고 견고한 영적 성숙을 이루어야 합니다.
지금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어디인지를 잊지 않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범죄한 아담을 찾으시던 하나님의 애타는 음성은 다름 아닌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겟세마네 기도의 자리에서 깨어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은혜를 경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곘습니다.
은혜로우신 하나님!
우리가 경계해야 할 거짓 교사와 거짓 가르침의 실체를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이 새벽에 우리 자신이 어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돌아보며, 주님 앞에서 온전히 돌이키는 시간이 되게 하옵소서. 무엇보다 영혼의 잠에서 깨어 우리가 있어야 할 기도의 자리를 지킴으로 원수 마귀를 대적하는 우리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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