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베드로후서 3:1-7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이제 이 둘째 편지를 너희에게 쓰노니 이 두 편지로 너희의 진실한 마음을 일깨워 생각나게 하여 벧후1:13
곧 거룩한 선지자들이 예언한 말씀과 주 되신 구주께서 너희의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을 기억하게 하려 하노라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조롱하여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그들이 일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이로 말미암아 그 때에 세상은 물이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설교: 주님의 재림 부인
준비하고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복이 있습니다. 히틀러의 그릇된 생각이 600만 유태인을 가스실로 몰고 갔습니다. 모두들 언제 죽을지 모르는 두려움에 휩싸여 있는 가운데 한 유태인 의사는 이대로 죽을 수 없다는 고민을 깊이 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우연히 유리조각 하나를 줍게 되었습니다. 매일 그는 그 유리조각으로 면도를 하면서 살겠다는 의지를 다졌습니다. 나치는 매시간마다 가스실로 보낼 유태인들을 뽑았습니다. 그러나 매번 새파랗고 깔끔하게 면도한 얼굴을 하고 있는
활기찬 젊은 의사를 끌고 갈 수는 없었습니다. 그의 가스실행이 하루 이틀 이렇게 미뤄지다가 드디어 독일이 패망했고 젊은 의사는 기적적으로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도움을 늦추지 않으신다. 다만 우리가 너무 성급해서 하나님이 도와주실 때까지 참지 못할 뿐이다."
이 젊은 의사의 말입니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참는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미래를 바라보고 참고 견디는 사람, 꿈을 이루기 위해 준비하며 기다리는 사람은 반드시 좋은 날을 보게 될 겁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에 대해 베드로 사도가 있었던 시대에는 거짓 교사들이 주님의 재림을 부정하고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오늘 말씀을 통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참으로 능력의 말씀으로 주님의 재림을 성실히 기다리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2절의 말씀을 함께 보시겠습니다.
1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이제 이 둘째 편지를 너희에게 쓰노니 이 두 편지로 너희의 진실한 마음을 일깨워 생각나게 하여
2 곧 거룩한 선지자들이 예언한 말씀과 주 되신 구주께서 너희의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을 기억하게 하려 하노라
사도 베드로가 수신자들에게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말하며, ‘내가 이제 이 둘째 편지를 너희에게 쓰노니’라고 합니다. ‘둘째 편지’는 베드로후서를 뜻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1장 12절에서 15절로 서신의 기록 목적을 밝힌 바 있는데, 편지 서두가 아닌 본론의 마지막 부분에서 서신의 기록 목적을 재차 밝힌 이유는 재림 신앙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전후서를 통해 사랑하는 성도들이 그들의 진실한 마음을 일깨우기를 원했습니다. ‘진실한’으로 번역된 원어는 ‘햇빛’이라는 명사와 ‘판단하다’는 동사의 합성어에서 파생된 형용사로서 직역하면, ‘햇빛에 의해 드러나는 선명함과 순수함’입니다. 그리고 ‘마음’은 신령한 분별력을 가진 마음을 뜻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전후서를 통해 성도들이 순수하고 신령한 분별력을 가진 마음이 생겨, 재림 신앙이 흔들리지 않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성도들의 마음에 생각나기를 원했던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2절이 알려줍니다.
베드로 사도는 두 가지가 생각나기를 원했습니다. 첫째는 ‘거룩한 선지자들이 예언한 말씀’입니다. 이는 구약시대 선지자들을 통해 전해진 말씀을 가리킵니다. 구체적으로는 세상의 죄악과 주님의 재림에 관한 말씀입니다. 둘째는 ‘주 되신 구주께서 너희의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입니다. 즉 사도들의 입을 통해 주님께서 전하신 말씀입니다. 구약시대는 하나님의 말씀이 주로 선지자들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에게 전달되었듯이 신약시대 초대교회는 주님의 말씀이 사도들을 통해 성도들에게 전달되고 있었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이렇게 말한 이유는 서신을 통해 전하는 권면이 자신의 말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오늘날 우리 역시 구약시대 선지자들이 전하는 말씀이나 신약시대 사도들이 전하는 말씀은 그들의 생각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 모두 성부와 성자께서 전하시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그 마음이 ‘햇빛에 의해 드러나는 선명함과 순수할’ 때 가능합니다. 물론 이 마음도 사람의 노력으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로 가능합니다. 우리는 이런 마음을 가지도록 늘 주님의 은혜를 간구해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베드로 사도는 주님의 재림을 흐리며 장난하는 거짓교사들의 어리석음을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3-4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3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조롱하여
4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사탄마귀는 거짓의 아비입니다.
이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마귀가 속삭이는 여러가지 거짓말 중에서 마지막 때에 수없이 많이 들려줄 가장 큰 거짓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재림은 없다' '재림은 우리 세대에 오지 않는다'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있다'는 등의 거짓말입니다. 이 거짓말을 받아들이게 되면 주님을 믿는 성도들에게 가장 치명적으로 찾아오는 것이 “나태함”과 “안일함”입니다. 재림에 대한 소망이 희미해지면 각 개인의 삶의 죽음에 대해서도 느슨해지게 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의 구원에 대해서도 여유있게 생각합니다. ‘언젠가는 그들에게 복음 들을 기회가 오겠지... 천천히 기회를 봐야지...누군가는 복음을 그에게 전하겠지...’
물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인내하는 것은 필요하겠지만, 깨어 있지 않으면 기회가 와도 놓쳐버릴 확률이 높을 것입니다.
재림을 기다리든, 개인의 자연사 죽음을 기다리든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재림의 날짜나 자신의 죽는 날짜는 아무도 모릅니다. 이것이 '바로 지금' 죽음을 준비하며 오늘이 마지막날인 것처럼 살아가야 하는 이유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주님의 재림은 분명한데, 이를 부인하는 거짓 교사들의 어리석음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조롱하는 자들’이란 성도들의 마음을 흔들려는 거짓 교사들을 가리킵니다. 거짓 교사들이 성도들을 조롱하는데, 조롱하는 이유가 자기 정욕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자기 정욕대로 행하며 성도들을 조롱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거짓 교사들은 성도들만을 조롱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부정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입니다. 이들이 하는 말이 이렇습니다.
주님께서 강림하신다는 말은 주님께서 재림하신다는 말입니다. ‘이 약속이 어디 있느냐’고 거짓 교사들이 말하는데, 천사들도 주님의 재림을 말하였습니다. 사도행전 1장 11절에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라고 말입니다.
분명하게 주님께서 말씀하셨음에도 재림을 부인하는 거짓 교사들의 유혹에 흔들리는 이유는 당시 주님의 재림이 곧 임박할 것이라는 오해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생각하지도 못한 때에 재림하실 것이기에 성도들에게 재림을 준비하라고 말씀하셨지, 재림의 특정일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늘날에도 세속적 가치관을 가진 교사들은 자연의 법칙과 자연의 힘을 말할지언정 자연의 법칙과 자연의 힘을 세우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부인합니다. 우리는 자연의 법칙과 자연의 힘과 이를 기초로 한 과학을 하나님보다 더 우위에 두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부인하는 사람이 주님의 재림을 인정할 리가 만무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주님의 재림을 부인하는 거짓 교사들의 터무니 없는 주장을 반박합니다.
5-7절의 말씀입니다.
5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그들이 일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6 이로 말미암아 그 때에 세상은 물이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7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5절에서 7절까지는 천지 창조와 노아 홍수 심판의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거짓 교사들의 주장이 틀렸음을 사도 베드로가 반박한 내용입니다. 5절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사실을 언급한 것입니다. 거짓 교사들은 이 사실을 일부러 잊으려고 한다는 지적입니다.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된 것’이란 창세기 1장 6절에서 9절의 창조 기사의 내용으로서 하나님께서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을 나누시고, 천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게 하시고, 뭍이 드러나게 하신 것입니다. ‘뭍’은 땅을 의미합니다. 이 물은 하나님의 창조물이고 또한 하나님의 손 아래 움직이는 자연의 일부입니다. 이 물이 노아의 때에 심판의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에서 ‘이’는 원문에 복수형으로 되어 있는데, 5절의 ‘물’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물이 창조되었고 그 물이 심판의 수단이 되어, 노아 시대에 세상을 심판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도 베드로가 과거 사실만을 전하려고 이 말을 한 것은 아닙니다. 자연의 법칙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움직인다는 사실과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심판, 즉 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리고 과거 하나님의 말씀으로 물이 수단이 되어 세상을 심판하셨듯이 미래에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불이 수단이 되어 세상을 심판하실 것임을 알리고자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불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물 심판은 홍수로 지구의 지면, 즉 땅을 다 덮어 땅과 땅 위에 존재하는 생명체에 대한 심판이었지만 불 심판은 땅뿐만 아니라 하늘도 포함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불 심판이 두렵고 무서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절망에 잠길 필요는 없습니다. 7절의 원문에는 ‘그러나’를 뜻하는 접속사가 있습니다. 하늘과 땅은 불 심판 때까지 보호되어 있습니다. 불 심판은 물 심판과 차이점이 있습니다. 심판의 대상이 땅 위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불 심판에서는 물 심판처럼 극소수만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죄사함을 받은 사람은 전부 구원의 대상입니다. 적지 않은 수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길을 걸어갈 때 겪는 어려움을 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던 주님을 본받아 기도하는 것이 필요하지만, 죽어가는 영혼들이 불 심판을 받지 않도록 기도하는 것 역시 필요합니다. 오늘 하루 죽어가는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그들이 주님을 만나도록 각자의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친히 하신 말씀뿐만 아니라 선지자와 사도들이 전한 말씀을 통해 저희에게 진실한 마음을 일깨워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언제나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즉각적으로 달려갈 수 있는 자가 되게 하소서. 다른 어떤 것보다도 한 생명의 구원과 성장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기며 살아가는 섬김의 자리에 있게 하소서. 그 자리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잊혀진 자리라 할지라도... 재림하실 주님께서 기억하시면 족합니다. 오늘도 범사에 감사하며 십자가를 붙잡고 썩어지는 밀알로서 하루해를 넘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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