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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후서 강해 13)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수요기도회 20240612)

by 온누리선교 2024. 6. 12.

 

본문: 베드로후서 3:14-18

 

14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15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16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17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가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18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

 

설교: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동료 효과(Peer Effect)라는 말이 있습니다.

주변인 혹은, 친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에게 영향을 받아 자기도 모르게 행동이 변하는 효과입니다. 실제로 주변에 과체중인 사람이 많으면 자연스레 살이 찌고, 행복한 사람이 많으면 저절로 행복해진다고 합니다. 또 다른 예로 유색인종 스포츠 스타를 좋아하는 청소년들은 커서도 인종차별과는 무관한 사람이 되며 오히려 호감을 느낀다고 합니다. 바로 옆에 있는 친구가 아니더라도 자신이 우러러보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영향력을 받는 것입니다.

베르테르 효과(Werther Effect)는 동료 효과의 가장 가슴 아픈 예입니다.

이는 유명인의 자살 소식이 들릴 때 많은 10, 20대들이 따라서 자살하는 사회적 현상입니다.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되는 동료 효과입니다.

반대로 테레사 효과(Teresa Effect)라는 바람직한 예도 있습니다. 마더 테레사처럼 다른 사람을 돕는 유명인들을 보고 봉사에 관심을 갖는 효과입니다. 연구에 따르면 봉사활동을 하는 모습을 영상으로 보기만 해도 사람은 행복감을 느끼고 삶에 대한 의욕이 상승한다고 합니다.

이 또한 동료 효과의 긍정적인 예입니다. 사람은 누구와 함께 있느냐, 누구를 우러러보느냐에 따라 삶에 큰 영향을 받습니다.

 

이 악하고 혼잡한 세상 속에서 나의 시선을 빼앗기지 말고, 오직 나의 친구가 되어주시고 구세주가 되어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 분이 우리에게 부탁하신 서로 사랑하는 일에 집중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소망합니다.

 

주님께서 주신 오늘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14절의 말씀입니다.

14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힘쓴다"라는 말은 헬라어로 너희는 진지하게 노력하라’, ‘너희는 열중하라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라는 말씀을 헬라어 성경 원문으로 직역을 하면 너희는 평강 가운데서 발견되도록 점 없고 흠 없는 그분에게 열중하라라는 뜻입니다.

베드로는 당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 앞에서 서기 위해 그리스도인들이 점도 없고 흠도 없이 나타나기를 힘쓰라고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점도 없고 흠도 없는 그리스도에게 열중하라고 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3년 동안 그리스도를 따라다니면서 자신의 열정을 나타낸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연약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인간의 연약이 자신만이 아니라 함께 부르심을 입은 보배로운 모든 성도도 그러한 연약 가운데 있음을 알기에 그리스도에게 열중하라라고 한 것입니다.

왜 그리스도에게 열중해야 합니까? 그리스도인들이 바라보는 것이 있습니다. 베드로후서 313절에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바라보는 곳은 새 예루살렘입니다. 새 예루살렘은 땅에 있는 예루살렘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이곳은 가 있는 곳입니다. 새 예루살렘에 있는 는 주 예수 그리스도 아닙니까? 로마서 117절에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라고 하였습니다. “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새 예루살렘에는 하나님의 의인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그리스도인을 향한 박해의 지역은 점점 더 넓어지고 있습니다. 박해의 강도도 점점 강해지고 있습니다. 베드로조차도 자기의 앞날을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장래에 어떤 일이 닥칠지 알지 못하지만, 베드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바라보는 그곳에는 하나님의 의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입니까? 점도 없고 흠도 없는 그리스도라고 하였습니다. 점도 없는 것은 오점이 없는 것이며, 흠도 없는 것은 비방할 것이 없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는 육신을 입으시고 33년을 이 세상에 사셨는데 하나의 오점도 남기지 않으셨습니다. 누구도 그리스도를 향하여 비방할 것을 찾지 못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점도 없고 흠도 없는 그리스도를 향하여 열중해야 함은 우리가 오점도 많고 비방 받을 것도 많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면서 우리의 오점이 곳곳에 있음을 보지 못합니까? 어떤 때에는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더 못한 연약의 모습을 보이지 않습니까? 만일 이러한 영적 상태에서 박해를 당하면 모두 넘어질 것입니다. 넘어지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열중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 평강입니다. 그분의 평강은 세상이 줄 수 없는 평강입니다. 요한복음 1633절에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제자들은 모두 예수를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그들이 예수를 버리고 도망을 간 것은 자기들에게 닥칠 위험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망과 죽음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는 도망간 그의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평안을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2019절에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하였습니다. 주 예수의 평강, 그 평강은 세상을 이긴 평강입니다. 환난 가운데서도 누리는 평강입니다. 주 예수께서 누리신 평강이며, 주 예수께서 가지신 평강입니다. 그 평강을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 그리스도인들에게 주고 계십니다.

박해를 당하여 흩어진 나그네로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평강이 있겠습니까? “흩어진것도 기가 막힌 노릇이며, “나그네로 일평생 살아야 하는 삶은 참으로 고달픈 여정입니다. “흩어진 나그네에게 평강이 있겠습니까? 언제 어떤 위기를 만날지 모르고 목숨조차도 경각에 달린 불안한 삶이 지속되고 있는데 어떻게 평강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주 예수께서 주시는 평강은 세상을 이긴 평강이기에 세상과 관계하지 않습니다. 세상과 관계하지 않는 것은 세상 사람과 관계하지 않으며 세상 환경과 관계하지 않습니다. 세상 그 어떤 일들하고도 관계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주 예수께서 주신 평강을 누리면서 그 평강 안에서 그리스도에게 열중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의 삶을 사는 성도는 이런 찬송을 부릅니다.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이것이 평강 가운데서 발견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누가 우리가 가진 평강을 빼앗아 갈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평강은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주신 그 평강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우리는 그 평강을 가지고 참 평강이신 그리스도께 열중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걸음을 걸으면서 많은 사람이 풍랑 이는 바다를 보고 두려워합니다. 베드로는 그 바다를 보고 다시 빠졌습니다. 베드로가 주 예수께 열중하였을 때에는 풍랑 이는 바다 위를 걸었습니다. 그가 주 예수께 열중하는 동안은 풍랑 이는 바다가 눈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눈은 주 예수께 고정되어야 하고 우리의 입술은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우리의 온 마음은 그리스도에게 열중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우리가 당하는 어려움에서 이길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를 붙들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열중하지 않으면 우리의 몸이 병이 날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께로 더욱 향하기를 바랍니다.

 

15~16절을 이어서 보겠습니다.

15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16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여기서 주의 오래 참으심은 주의 재림과 관계합니다.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은 삶의 여러 면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 어려움은 견딜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리스도인들 사이에는 주께서 언제 재림하실 것인가에 관한 관심도 높았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 벌써 30년의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잠시 후에 오신다는 그분은 소식도 없는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거짓된 재림 사상을 퍼뜨리는 세력들이 등장하여 성도들을 미혹하였고, 데살로니가교회의 경우에는 그릇된 재림 사상으로 인하여 교회가 혼란스러울 정도였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러한 교회의 형편을 알고 있었기에 재림의 임박함에 대한 접근보다는 재림에 대한 그리스도의 마음을 오히려 더 간절하게 나타내려고 하였습니다. 베드로후서 38, 9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을 본문 15절에서는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고 한 것입니다.

주의 오래 참으심의 은혜를 아십니까? 주의 오래 참으심에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배어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아무도 멸망에 이르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있습니까?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있다면, 우리는 그분께 우리를 의탁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의탁한 것에 대하여 그분이 지켜 주실 것을 또한 확신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신실하시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우리를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미혹의 세력들이 있습니다. 그 세력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지게 하려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할 것입니다. 본문 17절에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가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 신앙의 그리스도께 견고하게 서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편이십니다. 그분이 우리 편이 되심으로 이제 우리를 대적하거나 송사하거나 정죄할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의지하고 그 이름의 능력을 힘입어 그 이름의 승리를 누리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은혜로우신 주님~ 우리가 베드로 사도의 말씀들을 그동안 묵상하면서 주님께서 주신 사랑과 기적들을 생각해보게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이 마지막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소망하며 저 천국에서 하나님을 뵈옵고 살아갈 수 있는 기쁨을 누리게 하실 것을 믿으며 이 모든 말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