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요한1서 3:11-12
우리는 서로 사랑할지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
가인 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떤 이유로 죽였느냐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의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
설교: 서로 사랑할지니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흰 구름이 정처 없이 바닷가를 내려다보며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바닷가 소나무 밑에서 서로 등을 나무에 기대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 젊은 남녀를 보게 되었습니다. 흰 구름은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봤습니다. 남자는 가방을 하나 메고 모자를 푹 눌러 쓴 모습이었습니다. 자세히 보니 남자는 눈썹이 없었습니다. 문둥병에 걸린 환자였는데 그 흉한 모습을 가리기 위해 모자를 썼던 거죠.
“제발 날 잊어버려. 난 문둥병자야. 나 같은 환자는 소록도에 가서 살아야 하는데, 당신까지 문둥병자로 만들기는 싫어.”
그러자 눈썹이 솔잎같이 아름다운 여인이 말했습니다.
“전 제가했던 맹세를 지키기를 원해요. 기쁘거나 슬프거나 몸이 아프거나 병들었을 때에도 서로를 사랑하겠다는.... 전 당신의 겉모습과 결혼한 것이 아니랍니다. 당신의 자상함, 그 인간미를 사랑했어요. 저도어디까지든 따라 가겠어요.”남자는 여인에게 화를 내었습니다.
“이 바보야. 난 사실 널 사랑하지 않아. 난 사랑하는 사람이 따로 있어. 그와 같이 소록도에 가서 살기로 했단 말이야.” 여인은 할 말을 잃고 머뭇거렸습니다. 아마도 심한 충격을 받았나 봅니다. 그 사이에 남자는 배에 올랐고 배는 곧 떠나 버렸습니다. 여인은 눈물어린 모습으로 떠나는 배를 쳐다보고 있었고, 남자는 그제야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흰 구름은 비로서, 그 남자가 여인을 위해서 거짓말을 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습니다. 흰 구름은 안타까웠습니다. 늦은 밤. 소록도로 가는 마지막 배위에 여인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흰 구름은 더 지켜보고 싶었지만 얄미운 바람이 흰 구름을 멀리 멀리로 날려버렸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봄, 여름, 가을, 겨울 .... 오랜 시간이 흐른 후 흰 구름은 다시 그곳에 오게 되었습니다. 흰 구름은 열심히 그들을 찾아 다녔습니다. 그러던중 소록도 바닷가 푸른 언덕위에 지게를 풀어놓고 쉬고 있는 두 사람을 찾을 수가 있었습니다. 남자는 밀짚모자에 고무신을, 여인은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있었습니다. 흰 구름은 아주 흐뭇한 표정을 지을 수 있었습니다. 수건을 풀어 땀을 훔치는 여인의 얼굴에는 행복이 가득해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 아름다운 솔잎 같던 눈썹이 보이지를 않았습니다. 산들바람에 밀려 떠나가는 흰 구름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비록 모습의 아름다움은 잃었지만 그보다 더욱 아름다운 사랑을 얻었습니다. 사랑은 잃어버림조차도 아름다운 얻음이 될 수 있는 그런 것이랍니다.
사도요한은 오늘 우리들에게, 너희가 믿음을 지키고 의로운 삶을 살기를 원한다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어떠한 사랑을 베푸셨는지 기억하고 우리 죄를 없애려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듣고 그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서로 사랑할지를 함께 생각하는 시간을 갖기를 바랍니다.
11절 함께 읽습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할지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바라시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요 13:34). 그러나 이 시대의 교회들은 사랑의 모습을 많이 잃어버렸습니다.
미국의 어느 도시를 여행하던 여행자가 주일이 되어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교통순경에게 교회를 좀 가르쳐 달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순경은 멀리 보이는 한 교회를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행자가 주위를 둘러보니 가까운 곳에도 교회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순경에게 “왜 가까운 곳에도 교회가 있는데, 저렇게 먼 데 있는 교회를 가르쳐주십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순경은 “예배를 드리고 나오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면 이 근처에 있는 교회들보다도 저 교회에서 예배드리고 나오는 사람들의 얼굴이 훨씬 기쁘고 즐겁게 보였습니다. 나는 불신자이지만 그 교회가 은혜로운 교회인 것 같아서 소개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교회가 사랑이 있는지 없는지를 살펴보고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교회’란 건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 건물 안에 있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용어도 아닙니다.
교회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사랑의 공동체일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우리 모두가 이미 경험한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성도들은 사랑을 나타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성도로서 ‘하나님의 씨’가 그 속에 거하는 성도로서 다시 한 번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기를 다짐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12절의 말씀을 이어서 함께 보겠습니다.
13. 가인 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떤 이유로 죽였느냐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의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
내 인격속에는 가인과 같은 마음은 없는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가인을 악한 사람이고 아벨을 좋은 사람이라고 인식하며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의 마음은 언제나 아벨과 같이 선한 의로움만 갖고 있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소망은 희망일뿐 내면에 잠겨 있는 또 다른 내 속에는 추악한 가인의 속성을 갖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인격속에 아벨과 가인의 피가 공존하여 흐르고 있으며 마음속에 있는 가인과 아벨의 두마음이 내 자아를 지배하려고 서로 싸우고 있습니다.
아벨의 마음만 갖고 살고 있는 줄 알았던 내 속에 가인의 피가 흐르고 있고 또 내마음을 지배하고 있음을 인하여 우리는 놀랄 때가 있습니다. 이에 우리는 두려움을 느낍니다. 극악한 죄를 지은 범죄자들을 보고 우리는 인간의 탈을 쓰고 어찌 그럴 수가 있느냐고 이구동성으로 소리칩니다. 그러나 그렇게 욕하고 흥분하는 우리들의 마음속에도 그들과 같은 적개심과 살의가 가득하다면 감히 누가 그들을 향하여 돌을 던질 수 있을까요?
가인의 마음은 지금도 우리들의 마음에서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간음한 여인을 끌고 온 유대인들이 예수님앞에서 분노하지만 그들의 내면에도 간음의 욕구가 잠재되어 있음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스스로 돌을 버리고 물러갔던 것이 아니었겠습니까? 율법으로 잘 포장된 그들의 마음속에는 온갖 더러움이 있었던 것을 그들은 순간 알았을 것입니다.
그 누구도 간음한 여인에게 돌을 던질 수 없음을 알고 돌아섰던 군중들의 마음에도 가인의 마음이 도사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마음에서 가인의 마음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행함이라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속에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바울도 그렇게 자신의 이중성을 고민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렇다 이렇게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가인의 마음을 인하여 근심하고 탄식하는 자가 영혼이 건강한 자라 할 것입니다.
가인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그 마음에 이끌려 사는 자들은 이미 자신의 상태를 알지 못하는 심각한 병세를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건강한 사람은 애통해 합니다. 가인의 마음이 내 속에서 꿈틀대지 않도록 몸부림을 칩니다. 그리고 자신의 힘없음을 깨닫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으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고 주와 함께 동행하기를 힘쓰게 되게 되어있습니다.
나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가인을 이기기 위한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싶다면,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성경을 알지 못하고서는 하나님을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경 말씀을 소홀히 하는 것은 하나님을 소홀히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수십 년 동안 성경을 읽고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믿음에도 여전히 의심이 되고 불안할 때가 있습니다.
믿음이 자랄수록 의심과 불안이 조금씩 줄어들긴 하지만 그러나 완전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선을 행하고 의로운 삶을 살기 위해 힘씁니다.
우리는 선하기에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함으로써 내 안에 선이 있음을 확신하는 사람들입니다.
의롭기 때문에 의롭게 사는 것이 아니라, 의로운 삶을 살기에 힘씀으로써 내안에 죄를 이기신 예수님의 의가 있음을 확신하는 사람들입니다.
믿음으로 욕심을 이겼기에 구제하는 것이 아니라, 욕심을 이기기 위해 구제에 힘쓰는 사람들입니다.
믿음이 있어서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원수를 사랑하기에 힘씀으로써 내안에 예수님의 사랑이 있음을 확신하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을 읽고 믿음을 굳게 해도 여전히 타인을 미워하고 정죄하는 마음이 내 안에 흐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의 마음이 ‘미움과 정죄’에 중독되어 양심까지 마비될 것을 알기에, 더욱 자신을 내려놓고 성령님의 감동하심에 따라 사랑하고 섬기려 힘쓰는 사람들입니다.
오늘도 참 사랑으로 아름답게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저희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씨’가 죄를 짓지 않게 하고, 의를 행하게 하고, 서로 사랑하게 함을 믿습니다. 그러하기에 말씀과 기도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기에 더욱 힘씀을 고백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을 가슴 깊이 품고 하나님의 씨를 소유한 자로서, 의와 사랑으로 사람들을 섬기고 살리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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