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요한1서4:16-18
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17.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설교: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주인공 잭과 로즈는 유람선을 타고 여행하던 중에 만나, 신분의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사랑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들이 탔던 배가 빙산과 충돌해 침몰하고 맙니다.
바다에 빠진 그들은 배의 잔해 한 조각을 의지해 구조대원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런데 그 잔해 조각이 너무 작아서 두 사람이 올라타면 가라앉았습니다. 그래서 잭은 로즈를 잔해 조각 위로 올려 체온이 떨어지지 않게 하고 자신은 차가운 물속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물속에 있는 잭의 몸은 추위에 점점 굳어지고, 얼굴에는 핏기가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결국 마지막 힘까지 잃게 된 잭은 로즈에게 끝까지 살아남을 것을 부탁하고 그녀를 살리기 위해 물속으로 가라앉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사랑의 힘입니다.
단 며칠을 만난 사람일지라도 서로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목숨을 버리는 것조차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것이 우리 인간의 사랑이 가져오는 힘이라면, 우리 하나님, 예수님의 사랑은 어떠할까요?
우리를 사랑하신 예수님은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스스로 사람의 형체를 입고 종의 신분이 되는 것을 꺼리거나 두려워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치욕적인 십자가에 달리게 하심으로 우리에게 목숨까지 내어주셨습니다. 주저함이나 아까움이 아닌, 기꺼이 단번에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곧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오늘 사도 요한의 고백을 통해 우리 함께 생각하며 다시 한번 감사하는 시간을 우리 모두 갖기를 바랍니다.
16절의 말씀입니다.
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전혀 보지도 못하고 만난 적도 없는 사람을 그에 대한 말만 듣고 사랑할 수 있을까요? 아마 그럴 가능성은 없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사랑의 감정은 보고 만난 사람에 대한 반응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아니라 존경은 보지 못한 자에 대해서도 가능합니다. 그 사람의 업적이나 행한 일에 대한 존경심은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위인들에 대한 존경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지만 그들을 사랑한다는 것은 없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보지도 못하고 만나지도 못한 예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보지도 못하고 만나지도 못하였으면서도 가능한 것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보지 못하고서도 예수님을 사랑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1:8절을 보면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라는 말을 합니다. 보지 못한 분, 육신으로 대면하지 못한 분에 대한 얘기만 전해 듣고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과연 어떤 내용이 보지도 못한 그분을 사랑하게 하는 것입니까?
우리를 도우시고 복주셔서 풍족한 삶이 되게 하신다는 얘기가 예수님을 사랑하게 할까요? 우리의 병을 고쳐주시고 만사형통하게 하신다는 내용이 예수님을 사랑하게 할까요? 예수님이 세상에 계셨을 때 사람들의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 내셨습니다. 그때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좇았지만 그들이 예수님을 사랑해서였던 것입니까? 그들은 예수님이 좋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가지고 있는 능력이 좋았을 뿐입니다.
예수님을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예수님이 행하신 일 때문입니다. 그 일은 바로 자기 목숨을 버리시며 우리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사랑에 대한 반응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가장 먼저 이점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에 끼어들 자격이 전혀 없는 존재임을 생각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사랑에 눈을 돌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 큰 방해물은 우리가 스스로 신앙적이라고 믿고 있는 종교적 행위임을 누차 말씀드렸습니다. 어떤 종교적 행위를 신앙적인 것으로 규정한다면 필히 그것을 바탕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그 사람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보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로운 행위가 보이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의 사랑에 눈을 돌리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신앙적 행위로 여기는 것을 지키고 굳게 세우기 위해 힘쓰게 될 뿐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복음은 거부 대상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인간의 의의 행동을 다 무너뜨리고 대신 그 자리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굳게 세우는 것으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독생자를 희생하신 것으로 증거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대상이 아무런 가치가 없는 우리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사랑받을 가치가 없는 위를 위해 독생자를 희생하시고 우리의 영혼을 세상에서 건지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린 어떻게 살아갑니까? 사랑을 받아서, 사랑을 알았기에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로 살아갑니까? 천만의 말씀이죠. 여전히 우리에게서는 불평과 원망이 이어질 뿐입니다. 독생자를 죽이신 하나님 앞에서 기껏 우리는 세상에서 입는 것, 먹는 것, 나 잘되는 문제 등을 놓고 불평할 뿐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랑은 끊어짐이 없이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달아 알 때 하나님의 사랑에 마음이 굽히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온전하게 충분히 알고 느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 모든 마음을 두고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가를 알아가야지 예수님 밖의 것에 마음을 둔 채로 사랑을 본다면 ‘하나님의 사랑에 많은 차별이 있다’는 생각이 들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공평치 못하다는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자신을 보게 되면 구원받을 자격이 없는 죄인만 보여질 것입니다. 부자와 가난한 자가 보이지 않습니다. 멸망의 자식들만 보여질 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부자와 가난한 자를 구별하여 주어진 은혜가 아닙니다. 모두에게 공평이 주어진 은혜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알게 된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보여지는 자연스런 반응입니다. 즉 우리의 의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문제가 아니란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버지의 사랑이 어떠한 것인가를 아는 것이라는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겐 돌아온 경험이 없습니다. ‘나같은 자는 아들로 일컬음을 받을 자격도 없으니 그냥 품군으로만 써주십시오’라는 심정으로 하나님께 나아오는 것이 없습니다. 항상 잘못한 것이 없이 하나님을 위해 잘 살아온 신자인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곧 나간 자식임을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나가 있으면서도 아버지의 품을 그리워하지 않는 너무나 어리석은 자이면서도 그러한 자신을 모른다는 것에 대해 답답함을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상태에서는 아무리 하나님의 사랑을 말한들 쇠귀에 경 읽기 일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요한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여야 할 이유에 대하여 ‘사랑이 심판을 이기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17절 함께 읽습니다.
17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서로 닮습니다. 일례로, 부부가 함께 살다 보면 닮습니다.
서로 사랑하니까 같은 공간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고, 그러다 보니 언어도 닮고, 습관도 닮고, 얼굴도 닮아갑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을 닮게 됩니다. 주님께서 사랑하신 사람을 사랑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살아가신 삶의 모습을 닮게 됩니다. 주님의 겸손, 섬김을 닮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요한은 “주께서 그러하심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의 이러한 삶을 본받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담대함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담대함은 돈과 권력 같은 기득권에 의해 담대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아가페 사랑’으로 담대해집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성령의 함께하심이 우리 안에서 능력으로 나타나서 담대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서 담대하게 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사람들을 가르치실 때 권력자들의 눈치를 살피거나, 그들이 듣기 좋은 말들을 하지 않았습니다. 미움을 받고, 배척을 당하고, 고난을 받으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담대하게 세상에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담대함은 ‘아가페 사랑’의 힘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죄인들과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위해 일상의 편안함을 버리시고, 고난의 길을 걸을 수 있었던 힘의 근원이 아가페 사랑이었고 이 사랑이 담대함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사도요한은 ‘주께서 그러하심같이’, 곧 예수님께서 아가페 사랑으로 모든 것을 이기신 것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18절에 사도 요한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사랑하면 그 사랑이 두려움을 극복하게 한다는 말씀입니다.
실제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두려움을 극복하고 목숨을 버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랑의 힘이 죽음의 두려움을 이기게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마지막 심판대 앞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물으시겠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했는가?”라는 질문과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했는가?”라는 질문을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 자, 곧 사랑을 온전히 이룬 자들 외에는 그 누구도 심판의 두려움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하기를 주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직 예수님처럼 헌신적으로 모든 사람들을 사랑으로 대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저희들을 사랑하신 것 같이 저희들도 사랑하며 살기를 원합니다. 하늘에 속한 자로서 땅의 것을 바라보는 어리석음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최고의 선한 삶’을 증거하는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이를 위해 주저하지 않게 하시고, 사랑할 자와 멀리할 자를 구분하지 않게 하시고 날마다 성령충만함으로 예수님께서 그러하셨듯이 저희도 그러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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