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온누리선교교회/한국어예배

요한복음 강해 56) 끝까지 사랑하신 예수님 (수요예배 20130130)

by 온누리선교 2013. 1. 30.

본문: 요한복음 13:1~11

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3.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4.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5.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

6.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

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8. 베드로가 이르되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9.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옵소서

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11. 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하지 아니하다 하시니라

 

 

설교: 끝까지 사랑하신 예수님

 

오래 전에 이름을 밝히지 않은 사람이 고아원에 찾아와 이렇게 물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원하지 않을 아이가 있습니까?" 그 물음에 원장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습니다. "네, 있어요. 열 살짜리 여자아이인데 매우 흉한 꼽추예요. 단지 이름만은 좋아서 머시 굿페이스(Merch Goodfaith: 훌륭한 믿음의 은혜라는 뜻)이지요." "바로 그런 아이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이렇게 대답하고서 그 아이와 함께 떠났습니다. 35년이 지난 후, 아이오와 주 고아원 감사실의 실장은 한 고아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작성했습니다.

"이 가정은 매우 특별한 곳인데 깨끗하고, 음식도 훌륭하며 특히 그곳 원장은 사랑이 넘쳐 흐르는 영혼을 가진 사람이다. 이곳에 수용된 어린이는 모두 잘 보살펴지고 있으며, 원장은 풍부한 사랑의 영향을 보여주고 있다. 그들이 저녁식사 후에 피아노 앞에 모여 섰을 때 나는 다른 곳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분위기를 느꼈다. 나는 결코 그 원장의 눈과 같은 아름다운 눈을 본 적이 없다. 그들은 내가 그 원장의 얼굴이 보기 흉하고 꼽추라는 사실을 잊고 있는 데 놀라워했다. 그 원장의 이름은 머시 굿페이스이다."

어떤, 이름도 알 수 없는 사람이 추하고 보기 흉한 고아를 보살펴 줄 용기를 가지고 있었기에 머시 굿페이스는 사랑의 방법을 배우고 또 그 사랑을 백 배로 증식시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이러한 사랑을 오늘 예수님께서 친히 보여주고 계십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자로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 사랑을 우리도 친히 배우고 그렇게 사랑을 베풀 수 있도록 말씀을 나누시면서 은혜와 주님의 능력을 받으시는 놀라운 시간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

 

예수님은 제자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나듯이 그래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시간적으로 끝까지요 능력적으로도 끝까지요 속성적으로도 끝까지요 인간의 모든 한계를 넘어서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생각하건대 열두시간도 못되어서 십자가에 돌아가십니다. 눈 앞에 십자가가 있습니다. 다 알고 계십니다. 십자가의 길을 환하게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제자들과 함께 저녁만찬을 잡수십니다. 얼마나 비장합니까? 죽음을 앞두고 있는 그 순간에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통을 가지고 십자가를 지고 가지만, 가시면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제자들을 걱정하셨습니다. 놀라운 이야기가 아닙니까? 자신은 수난을 당하면서 자신의 고통과 불안과 그 아픔을 다 초월하고 제자를 사랑하셨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기 처지와 자기 기분에 매여서 사랑하기도 하고 사랑을 버리기도 합니다.

바로 가룟유다가 그리하였습니다. 2~3절을 보니, 가룟유다는 자신의 생각과 달리, 예수님께서 유대 종교지도자들에게 공격을 당하고, 자신이 생각한 권력과 능력을 가진 지도자가 아니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실속을 차리기로 마음을 먹고, 예수님을 팔 생각을 한 것입니다. 아마, 그 순간, 예수님과 가룟유다만이 제자들과 함께 하는 이 저녁만찬이 마지막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상황을 아시는 예수님의 행동을 보십시오.

4~5절입니다.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

 

이 위험하고 긴박한 때 예수님께서는 너무나 놀랍고 아름다운 행동 한 가지를 제자들에게 보이셨습니다. 그들의 발을 씻어주신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포장되지 않아 흙먼지 나는 길을 샌들 하나만 신고 다니기가 일수였습니다. 따라서 발이 더러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집이든 주인은 자기 집을 찾아온 손님에게 의례 발을 깨끗이 씻을 수 있도록 편의를 제공하는 것이 일상화되어 있었습니다. 종이 있는 집에서는 손님들의 발을 씻는 일은 당연히 그 종들의 몫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을 예수님께서 친히 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의 발을 친히 씻어주신 예수님의 이 행동은 겸손과 섬김의 최고의 본보기가 많은 사람들에게 되어왔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예수님의 그 행동이 갖는 의미는 거기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그 행위를 단지 겸손과 섬김의 본을 보이시기 위한 것으로 이해하고 만다면 그 행위의 보다 깊고 중요한 의미를 놓치고 마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 보다 깊고 중요한 의미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을 우리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에서부터 출발하여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먼저 베드로와 예수님 사이에 오간 말들을 다시 살펴봅니다. 본문 6-8절을 다시 읽습니다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베드로가 이르되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베드로는 자기의 발을 예수님께서 씻어주시는 일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고 했고, 예수님께서는 그러면 베드로는 당신과 아무 상관이 없을 것이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도대체 왜 베드로는 자기의 발을 씻기지 못하게 하였을까요?

발을 씻는 것은 종이 주인에게 하는 일이지 결코 주인이 종에게 해주는 일일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 말도 되지 않는 일을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보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우리의 주님되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도 말도 되지 않는 일입니다. 종이 주인을 대신해서 벌을 받거나 죽는 일은 혹 있을 수 있어도 주인이 종 대신 벌 받고나 죽는 일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이 죄 많은 사람들을 대신해서 죽는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놀라운 일을 행하신 것입니다. 그 완전히 우리의 상식을 뒤집는 구원의 역사를 행하실 것을 보이시는 상징적 행위가 제자들의 발을 씻으신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문 1절 말씀에서 “끝까지” 사랑하셨다“라는 말에 관심을 가지고 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시간적으로 마지막 순간까지 사랑하셨다는 뜻도 될 수 있지만 예수님께서 하실 수 있는 모든 것으로 있는 힘을 다하여 온전히 사랑하셨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셔서 대신 죽으신 그 역사야말로 “사람을 끝까지 사랑하심”의 표현이고 증거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자체만 해도 참으로 놀라운 예수님의 사랑에 감동받지만, 오늘 저 개인적으로는 제자들을 사랑하시어 제자들의 발들을 씻어주시는 모습을 보고 참으로 더 감동을 받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지금 예수님께서 누구누구의 발을 닦고 있습니까?

자신을 배신하고 팔아넘겨 십자가에 죽게 만들 가룟유다의 발을 닦고 계십니다.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이라고 하는 교부의 말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발을 씻길 때에 가룟유다의 발을 제일 먼저 씻겼다고 합니다. 원수며, 자신에게 해를 가할 가룟유다의 발을 씻기시며 제자를 사랑한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가룟유다의 검은 마음을 아시면서도 가룟유다를 섬기고 끝까지 사랑하였습니다. 가룟유다만 검은 마음을 가졌을까요? 우리가 쉽게 상상해볼 수 있습니다. 거의 아마도 제자들의 마음속에도 가룟유다 비슷한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잡혀가자, 제자들은 어떻게 했습니다. 예수님을 지키기는커녕, 다 흩어져 버렸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배반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는 어떠했습니까? 베드로는 세 번이나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하고 도망갔습니다. 제자들도 다 그러 그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랑하셨습니다.

그런가 하면 나머지 제자들도 시기 질투를 하고 있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발을 씻기게 되었는가? 그 배경을 생각하게 되면 참 기가 막힙니다. 이 밖에서 들어올 때에는 더구나 이 잔치에 올 때에는 발을 씻어야 하는데 종이 없을 때에는 서로서로 씻기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시기 질투가 나서 네가 크냐? 내가 크냐? 내가 우편에 네가 좌편에, 이러고 있을 때니 저들이 생각하기를 ''네가 내 발을 씻겨라 그러면 내가 네 발을 씻기겠다.'' 서로 팽팽하니 맞섰습니다. 결국을 발을 못 씻고 예수님의 발도 씻어드리지 못하고 만찬을 먹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그 우락부락한 마음, 시기와 질투로 가득한 마음을 헤아리시고 예수님께서 대야에 물을 떠다가 "내어놓아라" 그리고 씻기십니다. 베드로 차례에 갔을 때에 베드로의 체면이 말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성경에서 보면 "절대로 안됩니다" 그랬는데 헬라 원문대로는 "영원히 안됩니다"라는 뜻입니다. 내 발은 영원히 씻기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내가 네 발을 씻기지 아니하면 넌 나와 상관이 없다."

 

그러자, 베드로는 정말 질투와 욕심만이 가득찬채, 아주 엉뚱한 소리를 합니다. 9절에 보니,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옵소서”라고 말합니다. 이 장면을 보는 우리들도 참으로 인간적인 욕심으로 가득차, 혹시 예수님께서 씻겨주시면, 특별한 복이라도 올까해서 마구 던지 이 말들이 참으로 한심해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마음으로 베드로의 억지같은 이야기를 들어주시고 다독여 주십니다. 10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자신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자는 이미 목욕한 자로 빗대어 이야기 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여기서 함께 씻음을 받은 자들 가운데에서도 구원받지 못할 자를 이야기 하시는데, 그것은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라는 표현으로 돌려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요한은 빗대어 이야기 한 사람이 누구인지 압니다. 11절에 그는 바로 “가룟유다”라고 말합니다.

 

마 13:24-43에 나타난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가 생각이 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에서 집주인의 알곡을 사랑하시는 법을 보여주시며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셨습니다. 알곡이 상할까봐 가라지들에게 함께 비료도 주고 물도 공급합니다. 똑같은 사랑으로 공급합니다. 그러나 추수의 때가 오면,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주인의 곳간에 넣어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그대로 행하셨습니다. 끝까지 포기 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악인까지도 용납하시며 섬기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추수의 때, 심판의 때가 있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억울하고 힘든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소망하고 나가신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래서 끝까지 제자들을 사랑하시고, 자신들을 죽음으로 억울하게 몰아넣은 사람들까지 사랑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사랑이 과연 우리에게 있습니까? 실화 하나를 말씀 드리면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결혼에 실패한 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 남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있어서 이 아들을 데리고 두 번째 결혼을 했지만 역시 원만하지 못하여 많이 구타를 당하고 많은 고생을 하다가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서 또 다시 이혼을 하게 되고, 세 번째 남자와 결혼을 했으나 역시 원만하지 못했습니다.

결혼을 할 때마다 제일 처음 얻은 이 아들이 마치 큰 혹과도 같이 아주 불편하고 거추장스러운 존재로만 느껴졌습니다.

아들의 입장에서는 계속해서 의붓아버지를 두 번 세 번 바꾸어야 하는 그런 처지에서 사랑을 받지 못하는 존재로 ‘나는 왜 세상에 태어났는가. 왜 살아야 하는가’하는 그런 고통을 느끼며 아버지와 어머니의 무서운 부부싸움을 보면서 그렇게 살았고 그렇게 자라났습니다.

세 남자에게 배신당한 이 어머니는 아들을 가르치면서 ‘사람을 믿지 말아라. 사람을 사랑하지 말아라. 세상에 사랑은 없다.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다 가짜다. 아무 것도 믿을 것이 못된다’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급기야 이 아이는 공격형의 성격을 가지게 되었고 고등학교를 다니다가 큰 사고를 쳐서 퇴학을 당하고 군대에 입대하여 또 큰 사고를 내어 불명예 제대를 당했습니다. 어쩌다 결혼을 했지만 아내의 사랑을 받아줄 줄을 모르고 이해할 줄도 모르고 그는 항상 부부싸움을 격하게 하고 절망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가 나가는 직장 건물 옥상에 올라가서 누군가를 기다리게 됩니다. 1963년 11월22일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그 앞을 지나갈 때에 그를 향하여 총을 쏘았습니다. 그는 리 하비 오스왈드(Lee Harvey Oswald) 였습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한 번도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는 한 사람이 이 같은 엄청난 사건 엄청난 비극을 만들게 된 것입니다. 유명한 의사인 제임스 밥슨이라고 하는 분은 이 사실을 이렇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가정의 비극이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비극을 만들었습니다. 어머니로부터 전혀 사랑을 받지 못한 한 아들이 저지른 역사적인 비극이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만약 이 오스왈드가 예수님께서 자신을 끝까지 사랑하셔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삼일만에 살아나셔서 그를 사랑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의 인생은 어떻게 알았을까요? 아니 그 누구 하나라도 이 오스왈드를 포기하지 아니하고 예수님을 본받아 그를 끝까지 사랑해주었던들, 미국국민이 가장 사랑했던 대통령이 그렇게 길거리에서 비명횡사하는 사건이 일어났을까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끝까지 사랑하였으니, 너희도 사랑하라” 아무리 그 누가 내게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상처를 줬다하더라도, 가룟유다에게서 받은 예수님의 상처만 하겠습니까? 제자들의 배신만 하겠습니까?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내 안의 상처와 미움을 이 순간 버리시고, 주님의 끝까지 사랑하신 그 영원한 따스함 안에서 거하셔서 차갑고 힘든 세상에서 풍요롭고 평안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시면서 사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이 충만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배신하고 죽음으로 몰아넣은 제자들까지용납하고 그 발을 손수 닦아주셨습니다. 어찌 인간의 힘으로 그리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은혜와 성령의 인도하심 없이는 예수님처럼 우리가 살 수 없고, 그 안에서 평안을 누리지 못하오니, 주여 우리를 축복하여 주셔서 사랑으로 우리의 모든 인생을 채워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날마다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물질적 축복과 영적인 은혜도 누리게 하여 주셔서 예수님을 닮고 따라가는 삶이 지치고 힘들지 않게 하옵소서. 이모든 말씀 주 예수님 이름 받들어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