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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누리선교교회/한국어예배

대림절설교2)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리라! (주일예배 20131208)

by 온누리선교교회 2013. 12. 10.

 

성경본문: 요한복음 1:6~14

6.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7.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8.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

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설교: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리라!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나이 많은 대주교가 교회에서 기도합니다. 날마다 기도 합니다. “하나님...” 하고. 그런데 하나님이 어느 날 “왜 그러냐” 라고 말씀하시자 그만 깜짝 놀라가지고 심장마비로 죽었답니다. 날마다 기도하면서 ‘하나님’ 하고 부르기는 했지만 그냥 불렀기 때문입니다. 응답을 기대한 것도 아니에요. 오랜 세월 살아온 하나의 습관이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살고 있으니 이 대주교에게는 습관을 넘어서서 이제는 미신이 되었습니다. 교회 안에도 이런 일이 많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깨어서 만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을까요?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만이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에 우리를 있게 하신다는 것을 아시는 귀한 시간되시고, 또 우리가 어떻게 주님을 따르고 믿으며 살아야 하는지도 깊이 깨닫는 은혜충만한 시간되시기를 바랍니다. 9~11절입니다.

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저는 애국가를 부를 때마다 약간의 갈등을 겪습니다. 우리 애국가 가사에 보면 ‘하느님이 보우하사’ 이렇게 쓰여 있어요. 순간 볼 때마다 ‘이걸 하느님이라고 그냥 부를까 아니면 하나님이라고 살짝 고쳐서 부를까?’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도 하느님을 얘기 합니다. 그래서 물론 그 분들과 우리들이 하느님 얘기함으로써 의사가 소통되는 바가 있겠지요. ‘하느님’ 그러면 전통적인 하늘님이지요. 하늘에 계신 신이지요. 그러나 ‘하나님’ 하면 그건 기독교적인 고백이 그 안에 담겨져 있는 거지요. “많은 신이 있지만 하나님이야말로 한 분이신 그 분이시다.”라는 그런 고백이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을 이야기하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가 고백하는 하나님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하나님 그 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우리 앞에 계시되신 그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누구냐?” 가 중요합니다.

제가 예전에 천안 나사렛대학교강의를 가다가 고속도로에서 'Jesus loves you'라고 쓴 간판을 보게 되었습니다. 희안하다 생각하였는데 알고보니 고려 은단 사장님이 서울 소망 교회 장로님인데 기업 광고를 그렇게 하셨어요. ‘Jesus loves you' 이것은 ’God loves you'하고 같은 것 같으면서도 굉장히 차이가 나는 거지요.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신다. 서양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신다 할 때 그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되신 하나님으로 알고 있기에 문제가 없겠습니다. 그러나 한국적 문화와 한국적 심성으로는 ‘God loves you' 하면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자기마음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Jesus loves you' 예수님이 너를 사랑하신다. 예수께서 십자가와 그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신다. 그렇게 고백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문화에 따라서 어떻게 복음을 해석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초기 선교사들이 복음을 들고 들어 왔을 때 보니까 한국 사람들은 대문에서부터 저 뒷간까지 부엌과 온갖 곳곳에 귀신들이 다 있었습니다. 그래서 선교사들이 뭐라고 얘기했냐면 “다 그만두고 그저 딱 하나 예수 귀신 믿읍시다. 예수 귀신이 제일 강한 신이요.” 이렇게 이야기 했답니다. 그렇게 한국사람들의 문화와 한국사람들의 심성에 접근했습니다. 하지만 선교사들은 이렇게 한국사람들이 일단 예수를 받아들인 다음부터 어떻게 했느냐하면, 성경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하나님 말씀 속에서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깨닫게 하였습니다.

그러면, 말씀은 공부하는 건가요? 열심히 하면 익혀지는 건가요? 아닙니다. 머리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야 몸으로,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유대사람들에게는 말씀이 바로 이렇습니다. 히브리말로 ‘따바르’라고 합니다. 이 ‘따바르’라는 말은, 선지자를 통해서 들려주신 말씀. 그 말씀을 통해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구원하시고, 때로는 심판하시고, 절망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위로하시고, 약속을 주셨던 그 말씀입니다. 헬라 사람들의 로고스와 히브리 사람들의 ‘따바르’라고 하는 그 말씀을 요한복음에서는 하나로 묶어서 ‘말씀, 즉, 이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로고스’ 이신 말씀, ‘따바르’라는 그 말씀이 사람의 몸을 입고 나타나신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말씀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을 몸소 그 몸으로 감당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부활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학자들이 상상도 할 수 없는 사건입니다. 아무리 놀라운 체험을 한 자일지라도 십자가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죄인을 구원한다는 하나님의 방법은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일입니다. 그래서 세상이 알수도 없고 할 수도 없는 하나님만이 가지신 아주 주권적인 방법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만난 제자들, 사도들에 의해서 주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가에 대해 알게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과 승천 사건 이후에 성령을 받은 제자들에 의해서 예수를 고백하게 됩니다. 뭐라고 말합니까? “예수가 바로 그리스도다”. 우리는 더 줄여서 ‘예수 그리스도’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에 나온 대로 정확하게 말한다면 “예수가 그리스도다. 예수가 메시야다. 예수가 내 인생의 모든 물음에 해답이 되시는 분이다. 그리고 오늘 내 삶 속에 모든 문제와 모든 물음에 응답을 주시는 분이다. 예수가 그리스도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신앙고백을 헬라어로 ‘케리그마’ 라고 합니다. 그리고 “사도들을 통해서 증거된 예수 그리고 성령을 체험한 사도들에 의해서 시작된 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다른 거 하는 거 아닙니다. 교회는 구제도 열심히 하고 서로 모여 교제도하고 열심히 배우기도 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생명력은 성경공부 많이 하는데 있는 거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 열심히 돕는데 있는 거 아닙니다. 우리끼리 열심히 서로 교제하는 거 아닙니다. 가장 근본적으로는 이곳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곳입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하나님의 응답을 듣는 곳입니다. 내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곳이지요.

그래서 ‘칼 바르트’라고 하는 유명한 신학자는 “예수 그리스도는 세번 오신다”고 말합니다. 첫째는 인간이 되어 성육신 되어 이 땅에 오셨다. 그리고 마지막 세번째는 다시 재림하여 그 몸을 보이실 것이다. 그럼 두 번째는 뭐냐? 그 분은 성령으로 교회를 이루면서 이 땅에 오신다. 그래서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몸이다. 그래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해야 됩니다. 많은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에게 집중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교회 성도님들께서 이 사실을 잘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우리에게 이미 하나님께서 가정도 주시고 일터도 주셨습니다. 다 분량에 맞게 공부도 시키고, 여러 가지 다양한 경험을 하게 하셨습니다. 그래 우리의 일터, 삶의 자리들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있는 그 곳에서 예수 그리스도, 예수가 내 인생의 해답이 되시고, 오늘 이 문제에 응답해 주시고, 성령으로 나와 함께 하신다는 이 분명한 고백을 가슴에 분명히 안고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열심히 일하십시오. 어거스틴이 한 말대로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라. 그리고는 네 마음대로 하라.’ 이렇게 사시길 바랍니다.

 

오직 우리 안에 성령이 계신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예수 그리스도 그 고백이 분명히 살아 있다면, 그 다음에는 성령께서 여러분을 성격대로 은사대로 인도할 것입니다. 그래서 단순해야 힘이 있는 겁니다. 팔방미인이 굶어 죽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우직하고 단순해야 되는 겁니다. 하나님도 그런 사람을 좋아 하시지 않으십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주님을 향한 신앙 고백이 분명한 사람, 사람이기에 비행기 날듯이 뭔가 은혜가 넘치고 신이 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또한 사람이기에 비행기 내려앉듯이 우울할 때도 있고 침체될 때도 있고 어려울 때도 있습니다. 오히려 그 때, 감사해야 됩니다. 그게 사람의 참모습입니다. 그래야 그 위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이끄시고 주도하시는 은혜가 거기에 반드시 있습니다. 하나님의 때가 있는 거예요. 그러므로 믿고 의지하고 차분하게 우리는 그 때를 받아 들여야 합니다.

 

그래서 ‘로고스’란 말씀과 ‘따바르’ 라 하는 말씀이 사람의 몸을 입고 나타나신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셨다. 그리고 주님이 주신 그 말씀을 받아서 제자들이 증거하고 나가 복음을 전할 때 세워진 것이 바로 교회다. 그러니까 교회는 말씀을 놓치면 결코 안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 말씀은 기록됩니다. 그 말씀이 성경이에요. 성경은 객관적으로 기록된 계시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성경이 쓰여 지기는 했습니다마는 교회에 대해서 성경은 지극히 적었습니다. 글을 아는 자들만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루터의 종교 개혁 이전에는 성경은 있었으나 그것은 사실 뚜껑이 덮여 있었던 겁니다. 성경 없이 그냥 믿는 거지요. 카톨릭 교회를 통해서 보여주는 의식과 여러 가지 그림과 조각을 통해서 예수를 믿었던 겁니다. 그리고 그들이 철학적으로 해석해 놓은 많은 전통과 예식을 가지고 그냥 그렇게 하나님을 믿었던 겁니다. 사람의 생각에 맞아떨어졌던 것입니다. 그러자 로마 카톨릭 교회가 쭉 이어져 올 때, 그 곁가지에는 소위 이단으로 분류되었던 수많은 신앙 분파가 일어났습니다. 이런 분파들의 특징은 뭐냐. 그렇게 지식적으로만 아는 그런 하나님 그런 예수는 우린 거부하겠다. 뭔가 뜨거운 체험으로 몸이 흔들리고 뭔가 마음에 불이 떨어지는 그런 은혜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진짜입니까? 어떻게 만나야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까? 냉랭하게 뜨겁게 느껴지게 머리로만?

은혜로 만나야 합니다. 감각적으로만 만나는 것이 아니라 지식으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그렇게 만나야 합니다. 루터는 말합니다. 기록된 성경은 알고 보면, 사실은 죽은 글이다. 그러나 그것이 사람을 만날 때에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거기에 살아있는 놀라운 생명이 꽃피게 된다.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려질 때부터 성도는 성도되고 교회는 교회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착각하는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뭔가 뜨겁게 박수치고 이렇게 하면 대개 은혜가 된다고 생각하는 버릇이 있어요. 필요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서울 소망교회에 가보면 30분전부터 예배당이 꽉 차기 시작하는데 더 놀라운 것은 그 많은 사람들이 앉아 있지만 조용합니다. 말하는 사람 없어요. 그 시간은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에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조용히 기도하는 시간이에요.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분주한 세상 일상 속에서 T.V를 켜면 시끄러운 노래가 나오고 일주일에 단 한 시간도 조용히 내 마음을 하나님께 집중할 수 없는 이 어지러운 세상 속에서 우리는 한 시간을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 10분 20분 먼저 나와서 조용히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균형 있는 신앙은 객관적인 계시 진리와 주관적 계시인 은혜를 겸손이라고 하는 그릇에 담아내는 거예요. 하나님이 우주만물을 다스리시는 모든 진리를 우리가 다 알겠습니까. 내가 알고자 노력했습니다만 다 모르고 죽습니다. 이제 모르는 부분은 하나님께 맡기는 겸손이 있어야 되요. 그게 바로 믿음이지요.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찌 잘 나기만을 바랍니까. 아니요, 부족합니다. 연약합니다. 거짓됨을 스스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좌절하고 절망하지 않고 내게 약속해 주신 주님의 소망을 꼭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요, 절망도 교만입니다. 언제는 자기 힘으로 살았습니까? 절망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지만 우리는 적당히 절망하고 바로 그 절망을 멈추어야 합니다.. 그것도 교만이에요. 그리고 이제는 더불어 사는 그들에게 사랑을 나누고 그저 주님이 주신 사랑이 있기에 그 사랑으로 위로의 말 한마디를 던지는 겁니다. 눈빛 하나, 손길 하나, 다 사랑으로 하는 것이지요. 어떻게 이런 것들이 다 가능합니까? 12~14절입니다.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말씀 그대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사람은, 바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 다니는 것이 영광스럽지 않습니까? 끌려온 것같고, 두려워서 온 것같으십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교회 다니면서 믿음생활하는 것이 기적이고,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아기 예수로 오신 성육신하신 우리 주님을 새롭게 바라보아야 합니다.

곧 있으면 성탄을 맞습니다. 겸손하게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신 그 주님을 올바로 받아들이기 위해서 우리도 진리와 은혜를 사모할 뿐만 아니라, 겸손하게 우리의 마음을 낮추고 주님 앞에 마음을 열어야 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은혜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하루를 살고 올 한 해를 살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다시 주님의 성탄을 맞습니다. 아기 예수로 오신 그 놀라운 사건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진리, 내게 주시는 은혜, 그리고 그것을 올바로 받을 수 있는 겸손의 그릇을 준비하는 우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