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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누리선교교회/한국어예배

사도행전 강해 68) 성령을 따라가는 사도 바울 (수요예배 20150902)

by 온누리선교 2015. 9. 2.

성경본문: 사도행전 16:1~10

1 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이르매 거기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 그 어머니는 믿는 유대 여자요 아버지는 헬라인이라

2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받는 자니

3 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새 그 지역에 있는 유대인으로 말미암아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이는 그 사람들이 그의 아버지는 헬라인인 줄 다 앎이러라

4 여러 성으로 다녀갈 때에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이 작정한 규례를 그들에게 주어 지키게 하니

5 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건해지고 수가 날마다 늘어 가니라

6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7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8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9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10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설교: 성령을 따라가는 사도 바울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내 구주로 여기고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을 믿고 섬기며 사는 것은 무엇일까요? 아주 간단히 말하면, 내 뜻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주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말은 간단하지요, 내 뜻과 내 생각대로 사는 것이 쉽지, 남의 뜻을 따라주고, 남에게 온전히 맡기며 사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다 맡기고 살면 얼마나 편해?’라고 말하지만, 사람은 늘 의심병이 있어서 힘들어도 내가 하고 싶은 거, 어려워도 내 뜻대로 하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바로 주님의 뜻에 순종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니, 사도 바울이 주님의 뜻대로 디모데라는 하나님의 사람을 만나고 주님의 계획대로 선교지를 바꾸는 것을 봅니다. 제 3자의 입장인 우리는 ‘당연히 바꾸어야지, 사도 바울인데...’라고 생각할지 모르나, 우리가 사도 바울이라면 과연 이렇게까지 순종할 수 있는지 자신이 없습니다. 성령에 따라 주님께 순종하며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도 바울을 통해, 우리의 신앙이 바로 이러한지 살펴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령을 따라 순종함도 기꺼이, 행하심에도 기꺼이 하면서 주님께 나아가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1~3절입니다.

1 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이르매 거기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 그 어머니는 믿는 유대 여자요 아버지는 헬라인이라

2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받는 자니

3 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새 그 지역에 있는 유대인으로 말미암아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이는 그 사람들이 그의 아버지는 헬라인인 줄 다 앎이러라

 

바울은 루스드라에 가게 됩니다. 성경에는 아주 단순하게 한 줄로 써져 있지만, 이 곳은 참으로 바울 사도에게는 뼈아픈 곳입니다. 사도행전 14장에 보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부터 쫒아온 유대인들이 거기서 끌어내어 돌로 치도록 그 곳 사람들을 부추킵니다. 그래서 결국 바울은 돌에 맞았는데 너무 맞았는지 거기에 있던 사람들은 바울이 죽은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숨을 쉬었습니다. 일어났습니다. 이에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알았지만, 바울에게 개인적으로는 고통이 남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곳을 5년 만에 다시 돌아왔습니다. 고통의 장소로 돌아온 것입니다. 아마 루스드라를 들어가는 그 입구에서 바울 사도는 인간적으로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다시 들어옵니다. 그리고 이 곳에서 1차 선교여행에서 있었던 고통의 기억들을 넘어서게 만드는 사건을 만드십니다. 그것은 바로, 디모데를 만난 것이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1차 선교여행 때 큰 힘이 되어주었던 동역자 바나바를 잃었습니다. 실라와 함께 오기는 했지만, 힘이 되어주는 평생 동역자가 절실하게 필요했습니다. 그 때, 그 지역을 잘 알고 또 하나님을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잘 섬기는 모태신앙을 가진 디모데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고통스러운 기억이 있습니다. 그 고통스러운 기억 때문에 피하고 다니고 주님을 만나는데 주저한다면, 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저도 참으로 아픔을 겪어서 주님의 사역을 그만두고 잠시 사역의 자리에서 떠날 때가 있었습니다. 그 자리를 떠났다고 해서 그 아픔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픔을 안고 계속 괴로워했습니다. 그리고 아픔의 자리에 돌아와서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자, 하나님께서 새로운 복된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고통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인생을 포기하기도 하고 자신의 생명을 끊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자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고통의 자리에서 그 고통을 주님께 맡기고 주님의 품 안에서 견디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고통 너머로 보이는 축복을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됩니다. 아픔과 고통, 공포를 겪는 사도 바울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의 사람, 디모데를 만나게 하신 것을 잊지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럼, 왜 이방인 선교를 하는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디모데가 축복의 사람이었겠습니까? 1절에 보면, 디모데라는 사람은 어머니가 유대인이고 아버지가 헬라인이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다문화 가정의 아이였습니다. 유대인문화에도 익숙하여 히브리어나 아람어를 했을 것이고, 또 헬라문화에서 살아서 헬라어나 그리스로마문화를 잘 알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디모데 후서 1장에 보면, 디모데는 할머니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의 신실하고 거짓 없는 믿음을 이어받았다고 나옵니다. 다시 말하면, 어머니 유니게는 어린 나이에 다른 나라로 건너가 머물렀던 디아스포라였던 것입니다. 지금이로 치자면, 재일교포나, 재미교포같은 재외동포였던 것입니다. 한국 사람이 미국에 가도 김치와 밥을 먹으려고 하듯이 디아스포라들은 자기 고향을 떠나 외국에 살면서도 하나님을 믿는 신앙과 문화를 지키려고 노력했고 또 이런 사람들이 모여서 마을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디모데가 여러 문화를 잘 알고 상황도 잘 아니, 바울이 전도하러 가면 그 옆에서 위험한 일이 있거나 예상 못한 일이 있을 때 그 누구보다도 잘 처리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 누가 이렇게 젊고 유능한 선교동역자를 얻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을까요?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는 닫힌 문이 있고 열린 문이 있습니다. 어떤 문은 아주 오랫동안 닫혀져서 열려지지 않는 반면에 어떤 문은 노력하지 않았는데도 슬쩍 건드렸는데도 열리는 문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문을 닫으시면 아무리 열려고 해도 안 열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하나님께서 문을 여시면 어떤 사람도 그것을 막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진리를 잘 아는 사도 바울은 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건을 맞게 됩니다. 6~10절입니다.

6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7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8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9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10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디모데를 만나 탄력을 받은 바울은 계속해서 여러 성을 다니면서 복음을 증거합니다. 그리고 5절에 보면 사도행전의 교회가 나옵니다. “교회가 더 굳어지고 수가 날로 더하더라!” 멈출 줄 모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계속해서 움직이고, 새 생명을 계속 생산해 내었습니다. 성령님께서 강하게 역사하셔서 부흥이 일어날 때에 갑자기 성령님께서 바울의 사역을 가로막습니다. 그것은 바로 아시아로 바울이 선교를 위해 떠나지 못하도록 한 것입니다.

비두니아로 갈려고 하니 일이 안됩니다. 누군가가 막고 있습니다. 거기를 못 가게 막고 있습니다. 그 누군가가 바로 성령님이셨습니다. 두 번이나 막으신 것은 바울에게 ‘그 길이 아니다’라고 확실하게 말씀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말을 뒤집어서 생각하자면, 바울이 “하나님 무슨 소립니까? 이게 제 길입니다. 잘 되고 있잖아요?” 하면서 두 번이나 거부했다는 이야기도 됩니다. 그리고 두 번이나 성령님께서 막으셨는데도 고집을 부리고,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까지 간 것입니다. 드로아는 항구입니다. 소아시아로 향하는 배타는 그 순간까지도 바울은 성령님을 무시하고 꾸준히 갔다는 말입니다.

배타기까지 끝까지 고집을 부린 바울의 모습에서 누구의 모습이 보이십니까? 우리들은 전부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합니다. 자기밖에 모릅니다. 내 기도, 내 가정 내 직장 기도할 줄 밖에 모릅니다. 내가 잘되야 다 잘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기도를 넓게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지경이 넓어지기를 원하십니다.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지경까지 넓히게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도 바울의 지경을 넓히셔서 지금의 유럽이 바로 복음화가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할 것은 무엇일까요? 순종입니다. 성령에 따라 행하는 것입니다. 9~10절을 보십시오. 바울이 환상을 본 후에 어떻게 했습니까? 환상을 본 후에 ‘에이 좀 기다리다가 아시아로 떠나자’ 이렇게 했습니까? 아닙니다! 말씀에 나와 있는데로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났습니다. 마음을 확 바꾸어서 미련도 없이 마게도냐로 갈 준비를 했다는 것입니다. 10절에 보면, 끝부분에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라고 나옵니다. 여기서 ‘인정하다’라고 번역한 헬라어는 ‘쉼비바조’입니다. 이 뜻은 ‘격렬한 논쟁 끝에 설득당하다’입니다. 이 짧은 단어에 얼마나 바울이 갈등하고 힘들어했는지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련없이 성령님께 설득당하여 완전히 마음을 돌리고 주님의 뜻대로 선교를 나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우리는 간혹 하나님의 비전을 갖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비전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게 아닙니다. 우리의 꿈이 완전히 무너질 때, 우리의 뜻이 완전히 포기되어질 때 하나님의 비전이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하나님의 비전대로 이루어지면 우리의 모든 일들은 다 잘 풀리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안 풀릴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그 모든 것을 견디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내 뜻대로 안된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니, 끝까지 고집피우고 버티는 사도 바울을 하나님께서는 선택하셨습니다. 과연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이 없으면 선교가 이루어지지 않아서 붙잡으셨을까요? 아닙니다. 바울 없어도 하나님의 사역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굳이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설득시켜 성령에 따라 행하도록 하시는 이유는 바로 바울을 하나님께서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너무 사랑하셔서 기다리고 계시고 우리의 길을 막고 여기로 가면 안된다고 버티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바울처럼 순종하여 성령을 따라 가야 합니다. 이러한 성령의 이끄심에 순종하시고 그 안에서 늘 악한 영과의 싸움에서 이기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은혜로우신 주님! 우리가 늘 우리의 뜻과 생각을 가지고 주님께서 맞추라고 한 점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교만을 지금 회개합니다. 성령님께서 이끄시는 데로 살게 하시고 또 우리의 마음이 세상의 것에, 또 악한 것이 있지 않도록 주의 보혈이 우리 안에 흐르게 하옵소서. 우리는 주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자녀로서 사는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빠져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할 때, 주님 우리의 중심을 붙들어주시고 주님께 순종하며 살게 하옵소서. 주님의 뜻을 이루도록 우리를 사용하여 주옵소서 이모든 말씀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 받들어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