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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누리선교교회/한국어예배

요한복음 강해 68) 십자가의 영광 (주일예배 20130317)

by 온누리선교 2013. 3. 17.

성경본문: 요한복음 17장 1~8

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2.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4.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5.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6.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7. 지금 그들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다 아버지로부터 온 것인 줄 알았나이다

8.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며 그들은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

 

 

 

 

설교: 십자가의 영광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에서 주인공 강마에가 천재적인 음감을 가진 친구에게 열등감을 느끼는 장면이 나옵니다. 강마에가 피아노를 치는데 그 친구가 옆에서 듣고는 “네 피아노의 음이 1/8도 틀린다.”고 말합니다. 그 친구는 절대음감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1/8”도는 원래 음악의 신동인 모차르트가 일곱 살 때 친구에게 한 말이었습니다. “너 말이야. 지난주에 바이올린 연주 하고나서 악기 줄을 조율하지 않았다면 내 바이올린보다 1/8음이 낮을 거야.” 악기 줄이 느슨해져서 미세하게 음이 낮아진 것을 지적한 것입니다. 1/8도면 보통 사람이나, 뛰어난 음감을 지닌 음악 전문가도 식별하기 힘든 아주 미세한 음입니다. 반음이나 1도도 아니고, 1/8도를 알 정도면 그야말로 절대음감이 아니고서는 알아내기 불가능한 음입니다. 이처럼 사람 사는 세상에도 천재들만이 아는 절대적인 영역이 있듯이, 하나님의 영광은 절대적인 영역에 속한 일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만이 아시는 영역의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인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영화롭게 되신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완전히 알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영화롭게 해 달라.”는 예수님의 기도의 뜻을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는 단서가 있습니다. 그 단서가 “때가 이르렀사오니”입니다. 이때는 영광을 받으실 때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 가운데, 예수님을 통하여, 저주의 십자가를 영광의 십자가로 변화시킨 그 때를 아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의 영광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은혜인지,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말씀가운데서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그 놀랍고 복된 변화의 능력이 우리 삶에 가득히 퍼져, 우리 안에 도저히 해결방법이 없는 인생의 문제, 영혼의 문제들을 넘어서고 해결되는 일들이 일어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1절의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고별설교는 끝이 났습니다. 1절에서 “이 말씀을 하시고”라는 말은 요한복음 16장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마지막 당부한 것은 예수께서 세상을 떠나고 나면 핍박이 온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시겠다는 약속과 더불어 요 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위쪽을 바라보십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이러한 자세와 행동을 면밀히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눈을 돌리십니다.

우리가 마지막 바라볼 곳은 하늘입니다. 그 하늘에는 아버지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던 기도처럼 예수님 역시 “아버지여”하시면서 하나님을 부르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하셨던 일은 바로 기도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도대체 무슨 때가 임하였다는 것입니까? 이 기도는 예수님께서 원수들에게 붙잡혀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될 것을 앞두고 드린, 매우 긴박한 상황에서의 기도입니다.

“아버지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사람은 죽음에 직면하였을 때 그가 평소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는지 드러납니다. 본문 1절과 5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여 창세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십자가 죽음을 앞둔 예수님의 관심은 오직 아버지의 영광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아버지와 아들을 영화롭게 할 수 있을까요?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당시 예수님께서 유대사람들 뿐 아니라 이방인들까지 장정만 오천명 칠천명 모일 정도로 인기가 있었으니, 새로운 권력을 잡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진정한 영광은 그런 세속적인 것에 있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사랑하셔서 자신을 보내고 이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서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서 죽음을 감당하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그것만이 자신과 아버지에게 영광되는 길임을, 영화롭게 하는 것임을 아셨습니다.

이 십자가 영광을 위해 고난의 길을 가는 이유를 2절에서 말씀하십니다. 2절의 말씀입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하나님 아버지는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실 때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가지고 오셨습니다. 원문으로 직역하면 pavsh” sarkov”(파세스 사르코스) ‘모든 육체’를 말합니다. 모든 인류는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들입니다. 이 땅에 살아가는 모든 사람입니다. 한 사람도 예외가 없습니다. 요 3:36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날에 인류를 심판하는 권세를 가지고 계십니다(요 5:27).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은 이미 십자가의 죽음은 패한 것이 아니라 승리와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미 이 영광을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실제로 있었던 복음의 이야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호주 가까이 있는 뉴 헤불리지스 제도에 있는 30개 섬의 이야기입니다. 백인이 들어가 본 적이 한번도 없었던 이 지역에 영국선교사이며 학자인 죤 월리암즈가 1839년11월 20일에 처음으로 상륙했습니다. 그러나 상륙한 즉시 해변에서 살해되었습니다.

둘째로 해리스 목사가 들어갔습니다. 그도 3일이 안되어 학살되었습니다. 셋째로 죤 골든 내외가 들어가 원주민과 사귀는데 겨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그도 역시 오래 견디지 못하고 백인을 증오하는 토인에게 살해되었습니다. 그후 맥네어 선교사가 도전했습니다. 그도 결국 1년도 못되어 암살되었습니다. 다섯 번째로 상륙한 사람은 수년 전에 순교한 죤 골든의 동생이었습니다. 골든 목사는 가까스로 받아들여져 현지의 언어를 연구하고 신약성경 번역을 착수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괴한이 그의 서재에 침입했습니다. 그는 도끼로 처참하게 타살되었습니다. 그의 피가 마침 번역하고있던 사도행전 7장, 즉 스데반이 순교한 장면의 원고를 적셨다고 합니다. 그후 일곱째 선교사인 로버트슨 목사가 상륙했습니다. 비로소 로버트슨 목사에 의해서 30개 섬에 있는 전 주민이 기독교인이 되는 놀라운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사람이 보기에는 계속해서 실패하는 선교의 역사가 되풀이되는 듯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미리 그 결과를 내다보시고 계속해서 수확이 이루어지도록 복음의 씨앗을 뿌렸습니다. 하나님의 계획하심은 놀랍습니다. 철저히 헌신된 사람들을 보내시고 그들로 하여금 복음의 수확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선교의 열매를 거두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죽기를 작정한자는 영원한 생명으로 다시 태어납니다(요 12:25). 십자가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인하여 새로운 시작을 얻게 됩니다. 3절의 말씀입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십자가의 죽음 뒤에는 부활과 영생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것을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영생은 하나님의 유일성과 유일하신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아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는 것’ 참으로 중요합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부르짖기를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알자”(호 6:3)고 했습니다. 예레미야는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줄 깨닫는 것이라”(렘 9:24)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면, 예수님을 모르면 영생이 없습니다. “아는 것이니이다”의 ‘안다’는 ginwvskw(기노스코)라는 말로 체험적인 지식을 의미합니다. 다른 지식은 체험을 통해서 알게된다는 것은 이해되지만 하나님과 예수님을 아는 것에 어떻게 체험적인 지식을 얻을 수 있습니까?

그것은 성령을 받아 알게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요 3:5절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성령으로 나자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님을 아는 것은 성령의 역사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잘 팔리는 베스트셀러가 바로 성서입니다. 모든 문학의 기초내용이 바로 성서내용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성서내용을 그저 지식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안의 구원의 힘을 경험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아버지 하나님은 아들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세상에 보내셨고 영생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이 믿어지십니까? 그것이 참으로 내 안에 느껴지십니까?

한신교회에서 사역할 때에 부교역자들은 항상 성찬식때 배병배잔을 맡았었습니다. 성도들이 많아서 일사분란하게 배병배잔을 해야하게했기 때문에 전투를 방불케 할만큼 긴장도 하고 빠르게 움직여야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성찬식날, 그날도 변함없이 담임목사님께서 집례를 하시는데, “이것은 너희를 위해 흘리는 피다”라는 대목에서 갑자기 가슴에 찌릿한 묵직함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십자가의 예수님이 느껴지면서 나를 위해 흘리신 그 피, 보혈에 절절히 가슴이 뭉클해지고 동시에 감사함이 넘치게 되었습니다. 배잔을 하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나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로, 고개를 푹숙이며, 성도들 하나하나에게 잔을 돌렸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이 성령님을 통하여 제 영혼을 울린 잊지못할 사건이었습니다. 예배가운데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기도 가운데 예수님의 희생과 승리를 느끼시고, 이를 통해 하나뿐이신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4절의 말씀입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예수님께서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다”고 하셨습니다. 그 일이 곧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 지금까지 우리 주변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듣고 구원받고, 삶이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곳에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들조차도 이를 보지 못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몸은 교회로 향하고 있으나,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세상의 영광만 바라보며 살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7:26-30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사람들은 노아와 소돔 시대처럼 살고 있을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 순간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집 사고, 땅 사고, 자식 낳아 기르고, 그들을 시집 장가보내는 것이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며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하심과 은혜의 감격을 간직하고 계십니까? 만약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과 그로 인한 은혜가 우리 안에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고통스럽고 안타까운 생각이 없다면 지금 영생의 축복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드시 우리는 목숨을 걸고, 간절하게, 구원의 확신과 첫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영생의 복 가운데서 인생의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게 됩니다. 우리의 모든 고난을 넘어서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영생의 복은 그러한 힘이 있습니다.

5절의 말씀 이어서 봅니다.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예수님은 자신의 영광을 구하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임의로 행동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말씀을 하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기도의 구절을 가리켜 모리스(L. Morris)라는 신학자는 “차라리 성부 하나님을 위한 기도이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가리켜 ‘영광’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볼 때 저주의 십자가였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영광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자기 자식을 죽여가면서 아버지인 자신이 영광을 바란다면 정말 그분이 아버지가 맞는지 의심을 하게됩니다. 그래서 신학적으로 비판하시는 분들 중에는 하나님은 지나치게 이기적인 분이시기 때문에 그렇게 자신만을 아시는 분이라면 하나님으로 인정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차적인 해석은 어패가 있습니다. 성경을 통해 보면, 예수님의 관심은 언제나 하나님이신 아버지의 영광에 고정되어있습니다(요 12:28). 정말 철저하도록 자신의 삶 자체가 없는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이것이 너무나 당연한 것은 본질적으로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기에 예수님 인생이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의 영광이 바로 예수님의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우리와 같은 육체의 생명을 마치시면서까지 아버지 하나님께 간구 한 것은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시는 일이었습니다. 이 죽음은 육체를 입고 온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위대한 죽음이요 영광스러운 죽음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일을 완수함으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셨으니 우리도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가 주님의 말씀에 끝까지 순종할 때, 그것이 십자가를 지는 길이라 할지라도 끝까지 순종할 때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이제부터 우리의 기도가 바뀌어야 합니다. “하나님, 지금 제가 져야할 십자가가 있습니까?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 주세요. 예수님처럼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 일에 충성하여 하나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해 드리기 원합니다.” 라는 기도가 우리의 인생을 분명히 변화시킬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님 주시는 영광 안에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코 십자가의 길을 부담스러워한다거나, 피하려하지 말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본을 보여주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주시는 성령의 충만함과 놀라우신 능력으로 감당하여 큰 축복 안에 거하는 인생들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살아계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우리에게 십자가의 영광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저주스럽고, 흉물스런 십자가를 영광의 십자가, 복된 십자가, 생명의 십자가로 만들어주시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 때문입니다. 그 누가 저주를 축복으로, 죽음을 생명으로 바꿀 수 있겠습니까? 당신께서 보내시고, 당신의 독생자인 예수님께서만이 그리하실 수 있습니다. 날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십자가의 영광이 우리 삶에 나타나기를 애쓰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우리의 고통이 기쁨으로, 우리의 고난이 행복으로 변하는 일이 나타나게 하옵소서. 이 모든 말씀 귀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