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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누리선교교회/한국어예배

종려주일) 영광스런 성전 입성 (주일예배 20130324)

by 온누리선교 2013. 3. 24.

 

성경본문: 마가복음 11장 1~10

1.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 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2.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3.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4. 제자들이 가서 본즉 나귀 새끼가 문 앞 거리에 매여 있는지라 그것을 푸니

5. 거기 서 있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이르되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 하려느냐 하매

6. 제자들이 예수께서 이르신 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

7. 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어 놓으매 예수께서 타시니

8.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또 다른 이들은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10.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설교: 영광스런 성전입성

요즘 가끔 TV를 보면, 정말 신기하고 재미있는 장면들을 보게 됩니다. 얼마전 예능프로그램 런닝맨이라는 것이 있는데, 해외로 나가 미션을 하나하나씩 해결하는 특집프로그램이었습니다. 베트남, 홍콩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멤버들이 활동을 합니다. 그런데 공항에 입국하는 장면에서 참으로 놀랍습니다. 현지에 있는 많은 팬들이, 한국인들도 아닌 그 지역 사람들이 엄청나게 몰려들어, 공항이 마비될 지경이라는 것입니다. 현지 경찰들과 보안직원들이 나와 런닝맨 한국연예인들을 보호하느라 진땀을 빼고, 또 더 놀라운 사실은 현지팬들이 서투른 한국어로 피켓을 들고나와, 자신이 좋아하는 연예인의 이름을 외치고 소리를 지른다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나라말도 아닐터!! 그 정성과 그 환호는 참으로 진심으로 느껴졌습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저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셨을때 어떠했을까를 상상해보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환영하는 그 인파들의 진심은 어떠했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오늘 우리 그 환호와 감동을 함께 느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매년 우리는 종려주일을 맞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님을 맞아들이는 환호와 감동이 우리 인생에 자주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이 주님으로 인하여 기쁘고 행복하여지기를 바랍니다.

2~3절을 우선 함께 읽겠습니다.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예수께서 맞은편 마을에 가서 아직 아무도 타지 않은 나귀새끼의 매여있는 것을 끌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왜 하필이면 아무도 타지 않은 나귀새끼를 예수님께서는 원하셨을까요? 나귀나 말은 첫 자기를 탄 주인을 잊지 않고 충성을 다한다고 합니다. 혹시 영화같은 것을 보면, 한번도 사람을 태워본적이 없는 야생마가 잡혀오면, 길들여지기 위해 엄청난 고생을 하는 것을 봅니다. 아무나 태우지 않습니다. 누군가 타려하면 몸부림을 쳐서 떨어뜨립니다. 그러나, 만약 한 사람이 타서 견디고 자신의 주인으로 받아들이면, 그 말은 그 사람을 태우고 초원을 바람과 같이 가르고 다닙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서 어떠합니까? 우리는 아무도 타지 않은 나귀새끼 입니까? 주님 앞에 나와 예배를 드리고 있어도 우리 마음에는 누가 타고 있습니까? 세상걱정과 근심이 채우고 있고, 욕심과 이기심이 채우고 있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주님만이 가득차서 주님만을 내 인생에 태우는 그런 순전한 나귀새끼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4~6절의 말씀입니다.

“제자들이 가서 본즉 나귀 새끼가 문 앞 거리에 매여 있는지라 그것을 푸니 거기 서 있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이르되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 하려느냐 하매 제자들이 예수께서 이르신 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

본문을 보니 제자들은 가보았다고 되어있습니다. 제자들은 "세상에 그런 명령이 어디있습니까? 난 도무지 못하겠습니다"이렇게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 마을로 즉시 달려갔고, 주님이 말씀하신대로 나귀새끼 한 마리가 문 앞에 매여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보자마자 매여있던 줄을 풀었습니다. 매여있던 줄을 푸니 어떤 반응이 일어났습니까? 거기 있는 사람 중 어떤이들이 질문을 던졌습니다. 누가복음에는 그 나귀 임자였다고 합니다.(눅 19:33) 그러니까 제자들은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당당하게 이 나귀를 풀어서 데려가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 때 제자들에게는 등에 식은 땀이 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유월절 명절에 도둑으로 몰릴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먼저 아무런 설명이나 양해도 없이 그냥 당당하게 끌고가는 모습은 그 나귀의 주인이나 이웃사람들이 볼 때 너무나 뻔뻔스런 행동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명령대로 잘 순종했는데도 일이 꼬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중간에 아무런 어려움이나 난처한 일이 발생하지 않고 모든 일이 순조롭게만 진행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뿐입니다. 이런 일을 만나도 끝까지 말씀을 붙잡고 살아가면 성공적으로 일을 마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멘!!

어떻게 이 일이 해결되었는지 보겠습니다. 6절에 보니, "제자들이 예수께서 이르신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 갑자기 꼬여버린 이런 상황속에서 제자들은 침착하게 예수님께서 지시하신대로 말합니다. 그랬더니 주님께서 그 나귀를 쓰시겠다는 그 말만 했는데, 나귀새끼 주인이 허락하였습니다. 조금 전까지의 긴장된 상황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아무 문제가 없어진 것입니다. 왜 이런 역사가 일어났을까요?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에 모자라거나 더 넘치게 말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하신 그 말씀과 동일한 말씀을 전했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가진 능력만으로 충분하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필요했던 것은 단지 그 말씀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순종 뿐이었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에는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요? '이렇게 쉽게 문제가 해결될 수 있나"하면서 주님의 말씀에 강력한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왕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바로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에 진정한 능력이 있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는 자세를 가지는 것입니다. 그 말씀에 더하거나 빼지 않고 말씀하신대로만 사는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왕이신 주님께서 우리의 삶을 온전히 인도하실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제자들의 순종뿐 아니라 자신이 잘 매어놓은 나귀새끼를 “주님께서 쓰시겠다”라는 말에 순순히 내어준 주인에게도 감동을 받습니다. 주인은 평소에 이 나귀를 누구나 태울 수 있지 않도록 잘 매어놓았습니다. 이렇게 잘 매여 있는 나귀새끼를 주님께서 사용하십니다. 비록 새끼이지만 주님은 그것을 원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세련된자나, 부한자나 스스로 능력이 있는 자를 원하시는 것 이 아닙니다. 잘 매여져 있어 누구나 타지 않는 어린 나귀새끼를 주님께서는 즐겨 사용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다가오셔서 축복 주시기를 원하며, “너를 사용하겠다” 할 때 주저하시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오셔서 “너는 나를 위해 사명을 감당하라”할 때 두려워하거나 피하지 마십시오. 이사야 43장 1~2절의 말씀,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고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우리에게 말씀하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내어드리십시오. 내마음을 이곳 저곳에 나누어 놓지 말고, 주님께 모든 것을 드리고 주님의 하시는 일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주님께서 이루시는 놀라운 기적과 능력을 발견하시고, 그 영광 가운데 있으시길 바랍니다. 오늘 본문을 보더라도, 나귀새끼 주인이 예수님의 영광스런 성전입성때 영광에 참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조금 부족하더라도 마음껏 주님이 사용할 수 있는 나귀새끼를 내어드릴 때 가능하였습니다. 그 나귀새끼가 어떻게 사용되던지 간에 예수님의 쓸모대로 드릴 때 복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그리하여야 합니다. 이해되지 않고 도저히 인간의 마음으로 부담이 가더라도,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기꺼이 그렇게 살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나귀새끼 주인처럼 우리도 주님께서 보여주시는 구원의 영광과 축복 가운데 임하게 될 것입니다.

7절~8절을 읽겠습니다.

“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어 놓으매 예수께서 타시니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또 다른 이들은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여기서 겉옷이란 당시 사람들이 입었던 외투를 가리킵니다.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은 속옷과 겉옷을 입고 허리띠를 띠고 샌들을 신었습니다. 팔레스틴 지역은 대체로 일교차가 심하여서 낮에는 기온이 상당히 높이 올라 한 여름에는 40도를 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밤이나 겨울이 되면 기온이 급속도로 떨어지기 때문에 두툼한 옷을 입고 모닥불을 피워도 한기가 느껴질 정도입니다. 기후가 이렇다보니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겉옷인 외투가 필수였고, 겨울이 되면 옷을 여러벌 겹쳐입기도 했습니다. 대개의 이스라엘 사람들의 겉옷은 정사각형이나 직사각형의 긴 띠처럼 생긴 옷감으로 폭이 2~3미터 정도의 외투였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은 이 겉옷을 잠잘때 이불로도 사용하였습니다. 그래서 율법에 따르면 겉옷을 담보로 잡아도 해질때는 반드시 돌려주어야 했습니다. (출 22, 26~27장) 그래서 예수님께서 산상설교에서 보복하지 말라고 가르치면서, 겉옷에 대해 언급하셨을 때 사람들은 너무나 놀랐습니다. "누가 오른빰을 치거든 왼빰을 돌려대고 또 재판을 걸어 속옷을 가지려고 하거든 겉옷까지 내주어라"(마 5:40) 이 설교를 들은 유대인들은 소중하고 모든 것인 겉옷까지 자신을 괴롭힌 사람에게 내어주라는 말에 분명히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런 소중한 겉옷을 오늘 본문에 보니, 예수님께서 타실 나귀위에 안장으로 깔아드리고, 그 뿐만 아니라 입성하시며 가는 그 길에 깔아드린 것을 봅니다. 이것은 바로 자신의 가장 귀한 것을 내어드리며 주님의 입성을 전심으로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소중한 겉옷이 나귀 등에서 안장으로 쓰입니다. 자신의 소중한 겉옷이 흙모래바닥에 묻어서 나귀의 발굽에 찢혀나갈 수 있습니다. 한 벌밖에 없는 소중한 겉옷이 더러워지고 찢어져서 다시 추운밤에 입을 수도 없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에 관여치 않았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실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받아들였습니다.

9~10절 읽겠습니다.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이들이 주님을 경배하며 고백했던 찬송이 시편 118편 25~26절에 나와있습니다. 이 찬양은 포로된 상태에서 자유케된 사건을 감사하고 찬양하는 노래입니다. 예수님 당시 명절을 맞이하여 예루살렘을 방문하는 순례자들을 환영하며 함께 불렀던 시편이었습니다. '호산나'라는 말은 '주여 이제 구원하소서'라는 뜻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라는 표현은 구약에서 약속된 메시야를 가리키는 표현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메시야로 오신 주님이 이제 우리를 구원해달라고 요청하는 찬송을 부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메시야를 우리의 죄를 감당하고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영적으로 육적으로 구원받게 하는 자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우리 조상의 다윗의 나라여!"라는 표현을 빌어 생각해보자면, 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이 아니라, 단지 로마의 압제에서 이 메시야로 오시는 이가 해방시켜줄 것만을 원하였습니다. 예수님을 환영하러 나온 인파들은 흥분과 감격을 가지고 있었지만, 진지하게 하나님의 뜻을 찾는 모습은 없었습니다. 오직 자기의 기대와 욕망에 사로잡혀 있을 뿐이었습니다. 이런 예배는 능력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런 예배에는 하나님의 말씀도 제대로 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기는 하지만 하나님을 크게 오해하고 있는 예배인 것입니다. 보십시오. 결국은 이 열렬히 예수님을 환영했던 군중들이 자기 계산대로 안되니까 예수님을 어떻게 합니까?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라고 외치지 않습니까? 혹시 무당이 굿하는 모습을 보신 적이 있으시다면 여러분이 드리는 예배와 무당이 굿할 때 옆에서 비는 사람의 모습을 비교해 본다면 누가 더 진지할 것 같습니까? 오늘 본문의 환영인파들처럼 그 예배 속에 흥분이 있다고 감격이 있다고 진지함이 있다고 온전한 예배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면 온전한 예배는 무엇입니까? 그 마음에 예배하는 자의 중심이 바르게 서 있어야 합니다. 나의 기대와 욕망을 따라 하나님을 찾는 예배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묻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다짐하는 예배가 되어야 진정한 예배인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무당 앞에서 신께 비는 사람과 다를 바 없는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는 나의 뜻이 아니라 왕되신 주님의 뜻이 더 중요한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예화 하나를 소개하며 말씀을 마치고자 합니다.

전도자 무디는 어렸을 때 부흥집회에 참석하였는데 헤네스 발렐이라는 영국목사의 설교를 들을 때 마음이 열려 감동을 받고 뜨거워졌습니다. 그 목사님은 "하나님꼐서는 지금도 온전히 헌신하는 사람만 있으면 그를 통해서 지금까지 나ㅏ나지 않았던 더 큰 일을 할 수가 있다"고 설교하였습니다. 돈이 많다든지 재주가 많다든지 가 아닌 온전히 헌신하는 자라야 한다는 이 말씀을 듣고 무디는 바로 그 자리에서 "자기의 생애를 온전히 바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너무 기뻐서 눈물을 비오듯 흘렸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결국 무디는 미국의 경제 공황기에 100만명을 주님께 인도하고 사람들에게 주님의 뜻과 위로를 받게 하였으며 지금까지고 엄청난 기적의 일꾼으로 하나님께 쓰임받은 사람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결단할 것이 있습니다. 주님을 받아들이십시오. 주님을 내 마음의 성전에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거하게 하십시오. 내 모든 것을 바쳐서 아낌없이 드리시고 순종하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 영광스런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며 모든 축복의 길로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이러한 결단으로 주님을 영접하여 주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만왕의 왕되신 우리 주님! 오늘도 귀한 말씀으로 우리를 먹이시니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연약하여 늘 주님께 나아가는데 욕심과 이기심, 세상걱정과 근심으로 얼룩져 있습니다. 온전히 주님을 믿게 하옵소서. 우리의 삶이 주님께 충성함으로 나아가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주님께서 이루시는 모든 사역에 우리가 쓰임받게 하여주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 받들어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