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누리선교교회
부활절 설교 ) 부활하신 주님이 지금 우리에게 주시는 능력 (롬 6:9, 주일예배 20260405) 본문
성경본문: 로마서 6장 9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설교: 부활하신 주님이 지금 우리에게 주시는 능력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온 인류가 함께 기뻐하는 부활주일입니다. 우리는 오늘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라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언을 기념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매년 돌아오는 이 부활절이 자칫 교회 달력에 적힌 하나의 ‘절기’나 지나가는 ‘행사’로 끝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합니다.
부활은 2,000년 전 예루살렘의 어느 차가운 동굴 무덤에서 일어난 신비로운 옛이야기가 아닙니다. 박물관 유리 상자 안에 갇혀 있는 박제된 유물이 아닙니다. 만약 부활이 과거의 사건일 뿐이라면, 오늘 우리가 드리는 이 예배는 죽은 영웅을 추모하는 장례식과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은 지금 이 순간, 여러분의 삶의 현장 속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작동하고 있는 ‘현재 진행형’의 능력입니다.
많은 이들이 묻습니다. “목사님, 예수가 살아났다는 것이 오늘 당장 월세 걱정하고, 몸이 아파 씨름하며, 관계 때문에 속앓이하는 내 삶과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이 질문에 오늘 본문은 바로 그 질문에 대해 떨리는 감동으로 대답하고 있습니다.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우리의 삶에 이 부활의 신앙은 우리에게 정말로 중요합니다. 죽음이 아닌 생명을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확인하시는 이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본문의 말씀 함께 보겠습니다. 로마서 6장 9절의 말씀입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오늘 본문은 선포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이 짧은 문장 안에 기독교의 모든 승리가 담겨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들이 종종 등장합니다. 베다니의 나사로가 그랬고, 야이로의 딸이 그랬으며, 나인성 과부의 아들도 그랬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소생’한 것이지 ‘부활’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죽음 이전의 몸으로 돌아왔고, 결국 시간이 흘러 다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들에게 죽음은 잠시 비켜났을 뿐, 여전히 그들의 주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질적으로 완전히 다릅니다. 주님은 죽음 이전의 상태로 돌아오신 것이 아니라, 죽음을 관통하여 죽음이 더 이상 손댈 수 없는 ‘영원한 생명’으로 일어나셨습니다.
수술을 받아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저는 왼쪽 발목이 부러져서 재수술까지 두 번 수술을 받아본 경험이 있습니다. 수술 때마다 전신마취를 하는데, 이것은 거의 죽은 상태입니다. 전신마취에 들어가기 전에 항상 수술 동의서를 받을 때 “죽을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언급하고 그것에 동의하는 사인을 하지 않으면 결코 수술을 받을 수 없습니다.
전신 마취에 들어가면 의식이 없고, 꿈조차 꾸지 못합니다. 다행히 거의 죽은 상태가 되어야 의사와 간호사들은 그 수술 부위를 완벽하게 드러내고 고칠 수 있습니다.
수술 후 완전히 의식이 살아나고 가장 고통을 주고 삶을 괴롭게 만들었던 부위가 제거된 것을 알고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의사에게 완전히 생명을 맡겨야만 다시 온전한 몸으로 살아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 점을 생각할 때 오늘 성경 말씀은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우리가 이해하게 만듭니다.
로마서 6장에서 바울은 ‘주장하다’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 단어는 헬라어로 ‘퀴리에우에이(κυριεύει)’인데, ‘왕노릇하다, 주권을 행사하다’라는 뜻입니다.
인류 역사상 죽음은 모든 인간 위에 왕노릇해 왔습니다. 그 어떤 권력자도, 부자도 죽음 앞에서는 무릎을 꿇었습니다. 사망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독재자였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부활하신 순간, 사망의 통치권이 박탈되었습니다! 죽음은 예수님을 가둘 권리를 상실했습니다.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한다”는 말은 이제 죽음은 예수님 앞에 아무런 힘도 쓸 수 없는 ‘폐위된 왕’이 되었다는 선언입니다.
우리가 믿는 주님은 잠시 승리하신 분이 아니라, 영원히 승리하신 분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을 붙들고 있는 모든 ‘죽음의 세력’들은 이제 더 이상 여러분을 주장할 법적 근거를 잃어버렸습니다.
우리 이 시간 주님 앞에서 솔직해집시다. 우리를 가장 깊은 어둠으로 몰아넣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결국 ‘두려움’입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 버림받을지 모른다는 불안, 병들고 가난해지는 것에 대한 공포... 이 모든 두려움의 뿌리에는 결국 ‘사망의 권세’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2장 15절은 인간을 일컬어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 하는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두려움 때문에 비겁해지고, 두려움 때문에 타협하며, 두려움 때문에 사랑해야 할 때 사랑하지 못합니다.
기독교 장례식을 가보십시오! 미국이나, 러시아나, 한국이나, 중국이나 전부 동일합니다. 기독교 장례식은 “저 천국에서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라”고 말합니다. 눈물은 있지만, 장례식 찬송가는 “천국에서 만나보자 그날 아침 거기서 순례자여 예비하라 주가 부르신다”라고 고인을 잃은 가족들에게 분명한 메시지를 던져 주고 있습니다.
이 메시지는 바로 “부활 신앙”입니다.
부활 신앙은 두려움이 아예 없어지는 기계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두려움이 나를 엄습할 때, 그 두려움보다 훨씬 더 크신 부활의 주님을 바라보는 능력입니다.
주님은 요한계시록 1장 18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열쇠를 누가 쥐고 있습니까? 우리 주님이 쥐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망의 문 앞에 서 있는 자들이 아니라, 주님이 열어 주시는 생명의 문으로 들어가는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다시 사심”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부활은 미래에 일어날 사건인 동시에, 오늘 나의 삶을 바꾸는 엔진입니다. 많은 성도가 부활을 “죽은 다음에 천국에 가는 소망”으로만 제한합니다. 그러나 로마서 6장의 핵심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지금’ 다시 살았다는 데 있습니다.
어두운 방 안에는 온갖 먼지와 날카로운 물건들이 가득할 수 있습니다. 불을 켜지 않으면 우리는 그 어둠에 지배당해 한 걸음도 움직이지 못하고 공포에 떱니다. 그러나 스위치를 켜는 순간, 어둠은 순식간에 사라집니다.
방의 가구가 바뀐 것이 아닙니다. 상황은 그대로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빛’이 들어오면 어둠은 더 이상 우리를 주장하지 못합니다.
부활의 신앙은 우리 인생의 스위치를 켜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분노가 나를 끌고 다녔습니다. 예전에는 열등감과 비교의식이 내 인생의 주인이었습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주님이 내 삶의 주인이 되시면, 나는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니라 ‘생명의 자녀’가 됩니다. “나는 실패자로 정의되지 않는다. 나는 부활하신 주님의 사람이다!” 이 정체성이 바로 오늘 우리가 세상을 이기는 힘입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그는 주님을 배반하고 처참하게 실패했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 그는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부활은 완벽한 사람들을 위한 상장이 아니라, 베드로처럼 넘어진 자들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하나님의 강력한 손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최후의 승전보를 들려줍니다.
무덤은 비어 있습니다. 주님은 살아 계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소망도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가정도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다. 무너진 여러분의 믿음도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다.
혹시 지금 “내 인생은 끝났다”라고 생각하는 분이 계십니까? 주님은 무덤 속에서 말씀하십니다. “끝이 아니라, 이제 시작이다.” 이번 한 주간, 삶의 현장으로 돌아가실 때 이 부활의 확신을 가슴에 품고 나아가십시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라고 외쳤던 바울처럼, 우리를 주장하지 못할 절망을 향해 당당히 승리를 선포하는 부활의 증인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사망 권세를 깨뜨리신 승리의 주님, 오늘 부활의 메시지가 우리 가슴속에 불처럼 타오르게 하옵소서.
우리를 묶고 있던 두려움의 쇠사슬을 끊어 주시고, 죽음조차 주장하지 못한 그 생명의 능력이 오늘 우리의 삶을 이끌어 가게 하옵소서.
과거의 상처와 실패의 무덤 속에 주저앉아 있지 않게 하시고, 무덤 문을 열고 나오신 주님과 함께 담대히 세상으로 나아가게 하옵소서.
우리의 모든 일상이 부활의 증거가 되게 하시고, 오직 살아 계신 예수님만을 자랑하는 삶이 되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부활의 첫 열매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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