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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누리선교교회/한국어예배

요한복음 강해 73)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 (주일예배 20130331)

by 온누리선교 2013. 3. 31.

 

 

성경본문: 요한복음 20장 1~18절

 

1.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

2.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

3.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무덤으로 갈새

4. 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가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

5. 구부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

6. 시몬 베드로는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7.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더라

8.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9. (그들은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10. 이에 두 제자가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가니라

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12.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13. 천사들이 이르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이르되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14.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더라

15.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16.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18.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설교: 다시사신 예수 그리스도

 

날 때부터 몸이 꼬여진 상태에다 정신박약아로 태어난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12살이었지만 아직도 2학년에 속해 있어서 담임선생 도리스에게는 언제나 큰 부담이 되었습니다. 더군다나 이 아이는 몸을 뒤틀거나 시끄럽게 하여 다른 학생에게 지장을 주며, 학습을 자주 방해하는 것이었습니다.

도리스 선생은 지미의 부모를 학교로 오라고 하여 이 일을 상의하게 되었습니다. 도리스 선생은 “왜 아이를 특수학교에 전학을 시키지 않는가”고 부모에게 물어보니 지미의 어머니는 흐느껴 울기 시작했고, 지미의 아버지가 말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선생님, 지미를 위한 특수학교가 이 근처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지미는 이 학교와 친구들을 몹시도 사랑합니다. 만약 우리가 이 아이를 먼 곳의 다른 학교로 보내면, 그것은 아이에게 견딜 수 없는 충격이 될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선생님은 얼마 살지 못할 아이를 부모의 심정으로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기를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던 중 어느 봄 부활절이 가까워 오는 날이었습니다. 도리스 선생님이 플라스틱으로 된 계란들을 교실로 가지고 들어와서는 19명의 아이들에게 그 플라스틱 계란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계란의 중간을 열어 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 플라스틱 계란은 절반으로 잘라지며 열렸고 그 안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도리스 선생님은 이 플라스틱 계란을 가지고,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자세히 아이들에게 설명해주었습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그것을 집으로 가지고 가서, 무엇이든지 생명을 나타내는 것을 그 속에다 넣어 가지고 다음날 학교로 가지고 오라고 했습니다. 이튿날, 학생들이 계란을 모두 선생님의 책상에다 갖다 모아 놓았습니다. 선생님은 한 개씩 열기를 시작했습니다. 계란 속에는 예쁜 꽃과 물 등 갖가지 것들이 하나씩 들어있었는데 한 가지만 텅 비어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지미 것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왜 아무것도 없고 텅빈 것을 그대로 가지고 왔는가” 했더니, 지미는 순수한 눈방울로 선생님을 쳐다보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선생님이 말씀하시기를,

예수님의 무덤이 텅빈 것이라고 했어요!”

오늘은 2천여 년 전에 예수님께서 다시 사신 날입니다. 무덤은 비었고, 예수님의 모습은 다시 제자들에게,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살아 움직이시는 주님을 무덤과 같은 우리의 생각과 고집 안에 가두어 놓고, 늘 세상에서 실망하고 낙심하며 사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이 시간, 말씀 가운데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부활하셔서 우리와 함께 계신 주님을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사망권세를 이기신 주님께서 우리의 죽음과 같은 인생들을 다시 생명으로 꽃피우시게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부활 이야기는 막달라 마리아가 빈 무덤을 발견한 것으로 시작됩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이 들렸다가 예수님께 치유를 받은 여인입니다. 구원받은 후, 예수님의 전도여행에 함께 하면서 주님과 제자들의 식사를 준비하였습니다. 또한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그 장면을 멀리서 지켜보았습니다. 마리아는 안식 후 첫날 아직 어두운 새벽녘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다가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았습니다. 아직 어두운 때라는 것은 육안으로 잘 분별하기 어려운 때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 막달라 마리아나 다른 제자들의 영적인 시각 역시 어두운 상태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마리아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사람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가져갔다고 말합니다.

시몬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였고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는 오늘 본문을 기록한 요한입니다. 요한은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자기 자신을 가리킬 때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라는 표현을 합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가장 나이가 어렸습니다. 요한이 주님을 처음 만났을 때의 나이는 십대 후반에서 이십대 초반이었습니다. 부모가 자식 가운데에도 특별히 막내에 대해서 더 생각 하듯이 아마도 예수님은 가장 나이가 어린 막내 요한에게 좀 더 애정을 보이신 것은 인간적으로 당연하리라 여겨집니다.

여하튼, 막달라 마리아로부터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졌다는 소식을 들은 수제자 베드로와 애제자 요한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4절입니다.

“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가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

수제자와 애제자 사이에 경쟁심이 발동한 겁니다. 예수님과 함께 사역할 때에 열 두 제자들을 늘 괴롭히던 것은 그들 사이의 경쟁심이었습니다. 그 집요한 경쟁심리는 예수님의 무덤까지 누가 먼저 가냐 하는 달리기 경쟁으로 수제자 베드로와 애제자 요한사이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이 달리기 시합은 애제자 요한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당연히 수제자 베드로보다 젊은 애제자 요한이었기에 더 빨리 달릴 수 있었겠지요. 그런데 무덤에 먼저 도착한 요한은 그 무덤 안으로는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몸을 구부려 보았습니다. 여기에서 요한의 조심스러운 성품과 그래도 수제자이자 연장자인 베드로에게 무덤 안을 먼저 들어가게 하려는 양보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반면 6절을 보면 베드로는 무덤에 도착하자마자 무덤 안으로 들어갑니다. 이처럼 베드로는 생각하기보다는 무조건 먼저 행동이 앞서는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의 무덤 안으로 들어가자 요한도 들어가 눈으로 확인하고 빈 무덤임을 믿었다고 8절은 증언합니다. 그러나 8절에서 요한이 “보고 믿더라”는 말은 주님의 부활을 믿었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무덤이 비어 있다라는 눈에 보이는 객관적인 사실만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빈 무덤을 부활의 믿음으로 연결시키지 못하는 믿음의 상태가 요한의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수차례 제자들에게 당신께서 수난을 당하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시리라고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더군다나 그 제자들의 대표라 할 수 있는 수제자 베드로와 애제자 요한과 막달라 마리아 역시 그 빈 무덤을 보고도 주님의 부활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11~12절의 말씀입니다.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베드로와 요한이 빈 무덤을 확인한 후 그냥 집으로 돌아간 후에도 마리아는 무덤 밖에서 서서 울며 그 무덤 안을 들여다보았다고 오늘말씀은 증언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향한 마리아의 사랑이 열두 제자들보다 오히려 더 깊었음을 보여줍니다. 마리아는 무덤 안에서 두 천사를 보고 사람들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에 두었는지 모른다고 대답을 합니다. 그리고 우연히 뒤를 돌아보고 예수님이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님이신 줄 알지 못했다고 합니다. 마리아가 이전에 예수님을 한 두 번 본 것도 아닌데 왜 알아보지 못했습니까? 주님께서 이전 모습과 너무나 다르게 나타나셔서 마리아가 몰라본 것입니까? 그것은 아닐 겁니다. 마리아는 온통 머릿속이 오직 예수님의 시신에 대한 생각과 슬픔 때문에 그 시선은 오직 무덤 안에만 고정이 돼 있었습니다. 마리아 뒤에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서서 함께하고 계셨지만 마리아는 흐르는 눈물로 인해 시야가 정확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우연히 뒤를 돌이켜 예수님을 한번 힐끗 보고 계속 무덤안만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15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왜 울고 있느냐는 예수님의 물음에도 마리아의 시선은 주님을 향한 것이 아니라 무덤 안을 바라보며 여전히 예수님을 자신의 등 뒤에 두고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마리아가 대화를 나누는 곳은 무덤 안이 아니라 무덤 밖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여러번이나 주님께서 당하실 수난과 부활을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이나 마리아와 같이 예수님을 따라 다녔던 여인들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약속하신 말씀대로 이미 부활하셔서 무덤 밖으로 나와 마리아와 함께 하고 계셨지만 마리아의 관심과 시선은 오직 무덤안 주님의 시신에만 고정된 무덤안의 신앙상태에 머물러 있던 것입니다. 주님이 부활하심도 모르고 그 시신의 행방을 몰랐던 마리아에게는 모든 소망이 없어진 상태였을 겁니다.

마리아에게 소망이 없어진 것처럼 우리도 때로는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힘들고 어려운 상황을 만나기도 합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한계 상황에 부딪힐 때마다 우리의 등 뒤에서 함께 하시는 주님에게 우리의 시선을 돌이키기 보다는 눈앞에 펼쳐진 상황에만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킬 때가 많습니다. 무덤 밖에서 주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오직 무덤 안만을 바라보는 마리아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마리아의 등 뒤에는 여전히 주님이 함께 하셨고 그 마리아의 이름을 따뜻하게 불러주시는 주님의 모습을 오늘 본문을 통해서 발견합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이름을 불러주셨을 때 비로소 마리아의 신앙은 무덤 안 만을 바라보는 신앙에서 벗어나 무덤 밖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부활의 신앙으로 거듭나게 된 것입니다. 마리아의 등 뒤에 서서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시는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와 상관없는 주님이 아니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역사하시기에 우리 역시 부활의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부활신앙이란 “언제나 우리의 등 뒤에는 부활하신 주님의 따스한 시선과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고 계심을 믿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의 눈 앞에는 소망이 사라진 빈 무덤과 같은 상황이 펼쳐있을지라도 우리의 등 뒤에서 그 상황과 우리를 동시에 바라보시는 주님의 따스한 시선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견뎌낼 힘을 주시고자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는 부드러운 주님의 음성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허락하신 이 한 날도 우리 뒤에서 바라보시고 부르시는 주님의 시선과 음성에 우리의 눈과 귀를 온전히 맞추어 새 힘을 얻는 인생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주님, 부활의 약속을 주신 주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의 모습과 부활하신 주님을 뒤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하는 마리아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임을 깨닫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있어도, 눈앞에 빈 무덤만을 바라보며 낙망하는 마리아의 모습이 우리의 연약한 모습임을 깨닫습니다. 주님,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마리아의 등 뒤에 서서 마리아를 따스하게 바라보시고 그 이름을 불러주시며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을 믿기에 마리아를 향한 주님의 따스한 시선과 음성이 또한 우리를 향하고 계심을 깨닫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허락하신 귀한 날들도 주님의 시선과 부르심을 온전히 의지하며 나아가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