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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누리선교교회/한국어예배

요한복음 강해 74) 예수부활의 증거 (수요예배 20130403)

by 온누리선교 2013. 4. 3.

 

성경본문: 요한복음 20:19~31

19.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21.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2.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24.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26.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8.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30.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설교말씀: 예수부활의 증거

<뉴스위크>지 한 기사가 실렸습니다. 그 기사의 내용은 하나님의 존재를 끝까지 부인한 어느 과학자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미국의 저명한 천문학자 칼 세이건(Carl Sagan) 박사라는 이 사람은 골수암에 걸려서 투병하다 6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평소에 하나님의 존재와, 예수 그리스도와 부활, 그리고 그가 주는 영생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좀더 알고 싶어서 여러 명의 기독교 지도자들과 대화도 많이 나누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가 병상에 있을 동안에도 여러 교회에서 그를 위해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의 기본 입장은 이것이었습니다. “증거가 없는 한 확실히 알 수 없는 일이요, 확실히 알 수 없는 한 믿을 수 없는 일이다.” 철저한 불가지론이 그의 입장이었던 것입니다.

어느 날 그는 미국의 큰 기독교 단체를 책임지고 있는 어떤 목사님과 믿음에 관해서 여러 가지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대화 중에 그는 그 목사님께 너무나 답답하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당신같이 똑똑한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믿습니까?” 그러자 목사님은 그의 말을 받아 이렇게 되물었다고 합니다. “당신같이 똑똑한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믿지 못합니까?” 계속 대화가 오가는 중에 이번에는 목사님이 그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당신은 사랑을 믿습니까?” 그러자 그는 아내를 몹시 사랑하던 사람인지라 사랑을 믿는다고 대답했습니다. 그 목사님은 또 질문을 했습니다. “사랑의 존재를 입증할 수 있습니까?” 그는 처음에는 당연히 입증할 수 있는 것처럼 자신 있게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도 양심이 있는지라 결국 사랑에는 입증하지 못할 무엇이 있다는 사실을 솔직히 시인했습니다. 사랑에는 말로 다 설명할 수 없고 입증할 수 없는 무엇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랑을 부정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비합리적인 사고일 것입니다. 그는 대화를 주고받는 가운데 신앙 역시 입증하거나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부인하는 것은 바른 자세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믿기를 거부하고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그가 죽은 다음에 그의 부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남편은 믿음을 갖고자 한 적이 없었어요. 다만 알고자 했을 뿐입니다.” 다만 알고자 하는 사람과 믿음을 갖기를 원하는 사람은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습니다.

초대교부 중의 한 사람 안셀름은 “나는 알기 위해 믿는다”고 말하였습니다. 기본적인 믿음이 없으면, 이 세상의 진리와 사실들을 깊이 있게 인식할 수도, 알아낼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속에서 예수님께서 다시 사심을 보고 들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진짜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진짜 부활하신 예수님을 우리가 믿지 못하여 우리의 인생에서 살아 움직이시며 이끄신다는 믿음이 흔들린다면, 바로 그 의심을 없애버리시고, 굳건한 확신으로 주님에 대한 믿음을 세우시는 시간되시기 바랍니다.

19~23절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부활의 예수님을 만나면 공포가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니, 열 명의 제자들이 모인 곳에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가룟 유다는 이미 목매달아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도마는 외출했다가 아직 안 돌아왔습니다. 그곳에 다른 무명의 제자들이 있기는 했지만 이 열 명의 제자들이 이 그룹의 중심입니다. 그들은 모두들 공포에 짓눌려 있었습니다. 열 몇 명의 장정들이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있었다는 것만 봐도 그들이 얼마나 두려움에 떨고 있었는지 충분히 상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한참 인기를 끌고 사람들의 환호를 받을 때는 제자들의 기세가 등등했습니다. 그 때에는 겁낼 것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믿고 의지했던 선생님이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는 모습을 보고는 그들은 자신감과 용기를 몽땅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군중은 간사합니다. 한때는 “호산나”를 연호하며 그렇게 열광했던 그들이지만 예수님께서 맥없이 십자가에서 처형되는 모습을 보자 한 순간에 돌변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험악한 분위기가 제자들의 주변을 점점 조여들기 시작했습니다. ‘선생님도 저렇게 비참하게 죽이는데 제자인 우리들을 가만 두겠느냐’는 생각이 들자 말할 수 없는 공포감이 밀려왔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낮은 물론이고 밤중에조차 방문을 굳게 걸어 잠근 채 두려워하며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 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이 제자들을 찾아 오셨습니다. “샬롬,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 비참한 죽음을 당하고 이미 장사까지 된 예수님이 눈앞에 나타나셔서 “샬롬”하시는 말을 들은 제자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축 처져있던 어깨가 힘을 얻었을 것입니다. 가슴을 누르고 있던 공포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평안이 찾아왔을 것입니다. 세상 그 누구도 두렵지 않은 용기가 샘솟았을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한 변화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뿐만 아니라 제자들에게 자기가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나는 유령이 아니다. 내 손을 보라. 내 옆구리를 보라.” 제자들이 그래도 의심하는 것 같으니까 나중에는 “너희에게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가지고 와 보라.”고 하시고는 제자들 앞에서 잡수기까지 하셨습니다(눅24:41). 자신의 몸이 부활하신 몸임을 분명히 확인시켜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제자들에게 소명을 주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세상으로) 보내노라”(요20:21). 그 다음에는 그들을 무장시켰습니다. “성령을 받으라. 너희들이 나가서 하나님의 용서를 외치면 그 용서를 받는 자는 용서받을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듣고도 받지 아니하면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으라”(요20:22-3). 두려움으로 떨고 있던 제자들을 영적으로 무장시키신 것입니다. 이제 제자들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며 고문하던 공포가 완전히 사라져버렸습니다. 담대해졌습니다. 마음에 평안이 찾아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능치 못할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어떤 면에서 인생은 산다는 것 자체가 두려움입니다. 세상은 무시무시한 곳입니다. 너나 할 것 없이 마음속에 은근한 공포를 다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은 정말 무서운 곳입니다.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는 곳이 바로 세상입니다. 소련의 공산권 독재자 스탈린이 공산주의 유토피아를 세운다면서 어떤 일을 저지른 줄 아십니까? 일 년에 칠만 명을 총살시켰습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북한의 김정은이 자신의 김씨일가 독재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전 북한 주민을 주체사상화시킨다며 집단최면으로 자신의 일가를 종교화시켰습니다. 그뿐입니까? 전 세계국가를 상대로 핵무기를 가지고 자멸과 세계파괴라는 위협으로 줄타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공포가득한 지옥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하루하루를 살면서 세상에 대한 공포로 인하여 괴로움 가운데 살고, 그것을 잊고 살아남기 위해 본능적으로 이러한 공포에 무디어지려고 노력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부활하신 주님이 계십니다. 요한복음 16장 33절을 보십시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우리가 세상에서는 고통도 당할 수 있고, 실패 할 수도 있고, 핍박당할 수도 있고, 또 어떤 때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공포에 짓눌려 고생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 모든 상황들을 다 주님은 인정하십니다. 그리고 분명히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우리가 그 모든 상황에도 담대할 수 있는 한 가지 이유는 예수님이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이기고, 죽음을 이기고, 죄를 이기고, 인간의 슬픔을 완전히 발로 밟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우리의 보호자가 되시고 우리와 함께 동행하시며 날마다 우리와 만나 주시는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계속 두려움의 노예로 살 수 있습니까? 살 필요도 없고, 살 수도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좌절과 공포라는 말이 존재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샬롬. 평안이 있을 지어다.“ 하시는 주의 음성을 우리가 말씀을 통해 날마다 듣는다면, 무릎꿇고 기도하는 가운데 이 음성을 들을 수 있다면, 우리의 불행은 끝을 맺게 됩니다. 왜입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평안한데 왜 공포가 우리 마음에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단지 ”아.. 설교좋네... 설교말씀 맞지“라는 것에서 끝나지 말고, 우리의 마음에서 이 말씀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진심으로 받고 우리 안에서,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날마다 체험을 통해 기적이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은혜가 날마다 저와 여러분에게 지금 이 순간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24~29절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의심이 사라지게 됩니다.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기뻐하고 있을 때, 도마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나중에 다른 제자들로부터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야기를 듣고, 도마는 “난 믿을 수 없어. 내가 직접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분의 못박힌 곳에 찔러 보고, 내 손을 그의 옆구리에 넣어 보기 전에는 결코 믿을 수 없어”라고 했습니다. 바로 도마의 이 말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의심장이 도마”라고 부릅니다. 어떤 사람은 도마를 “회의론자(skepticist)”라고 하기도 합니다. 회의론자들은 자신의 이성으로 설명되지 않고 납득되지 않는 것은 믿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제자였던 도마가 그런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많은 학자들이 도마를 갈릴리 출신이라고 말합니다. 갈릴리 디베랴 바다에서 세베대의 두 아들, 나다나엘과 함께 어부로 살았다고 합니다(요한복음 21:2). 그러나 다른 제자들과 달리 도마가 어떻게 예수님의 부름을 받고 제자가 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디두모(Didymus)” 즉, 쌍둥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던 도마는 매우 복합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던 것 같습니다. 다른 제자들과 달리 도마는 매우 용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예루살렘 근처에 있는 베다니로 가려고 했을 때, 모든 제자들이 말렸습니다. 그곳에 가면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는데, 굳이 위험한 곳에 갈 필요가 없다고 제자들은 예수님을 말렸습니다. 그러나 도마는 “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요11:16)”라고 다른 제자들에게 말한 것으로 보아 도마는 매우 용감하고, 예수님께 대한 충성심이 매우 강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도마는 참으로 솔직하고 호기심이 많고 아주 정확한 사람이었습니다.

최후의 만찬 때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의 생이 얼마 남지 않는 것을 말씀하시면서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알지 않느냐? 그러니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고 제자들을 위로하셨습니다. 비통한 제자들은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그 때, 도마가 침묵을 깨고 이렇게 말합니다. “아니요,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지도 모르는데 저희가 어떻게 그 길을 알겠습니까?” 이 때 예수님께서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바로 그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사람이 아무도 없다.” (요한복음 14:6) 예수님께서 당시 제자들 듣기에 애매모호한 말로, 십자가고난을 당한 후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나라에 가시는 일에 대해 말씀하셨을 때, “아니요, 우리는 그 길을 모릅니다!” 라고, 오직 도마만이 침묵을 깨고 말했던 것입니다. 이것으로 보아 도마는 매우 솔직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매우 호기심이 많은 사람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성격의 도마라면 오늘 말씀이 이해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또 주님의 손과 옆구리를 보았다는 다른 제자들의 말을 듣고 “난 내가 직접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분의 못 박힌 곳에 찔러 보고, 내 손을 그의 옆구리에 넣어 보기 전에는 믿지 못하겠다”고 말한 도마의 말이 이해가 됩니다.

오늘 성경 말씀에서 충격적인 사실이 있다면, 이런 도마에게 주님이 다시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님께서 이런 도마를 인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인정하셨기에 다시 도마에게 나타나셔서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신 것입니다.” “네 손가락을 여기에 찔러 보아라.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믿지 않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어라.” (27절)

여러분, 세상에 있는 것들 중에 앞뒤가 딱 맞아떨어지는 것이 얼마나 됩니까? 공식을 가지고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이 과연 몇이나 됩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신 사건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자신의 몸을 600여명의 사람들에게만 보이시고 그 다음에는 아무에게도 보이시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자기를 본 사람들에게 가서 전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들의 말을 듣고 믿게 하신 것입니다.

31절을 보십시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사도 요한이 왜 요한복음을 기록해 놓고 일일이 설명을 하고 있습니까? 자기가 본 그대로 기록한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본 사람들의 증거를 듣고 믿어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몸을 일일이 개인마다 찾아다니며 보여 주시지 않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의 말을 듣고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나름의 합리적인 잣대를 고집하며 믿기를 거부한다면 그런 사람은 구원받기가 어렵습니다.

아직도 의심을 가지고 있는 분이 계십니까? 아직도 자신도 모르게 회의적인 생각에 끌려 다니는 분이 계십니까? 도마처럼 예수님을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만난 후에 도마가 무엇이라고 고백했습니까?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28절). 도마는 그때부터 믿음의 사람이 되었고 결국은 수십 년 후에 인도에 가서 복음을 외치다가 순교하는 자리까지 갔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활의 주님을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회의적인 사람일수록 이 예수님을 만나셔서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시는 주의 음성을 날마다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 자신에게 변화가 일어납니다. 의심이 사라지고 확신이 찾아듭니다. 소망이 없는 자가 소망을 갖게 됩니다. 방황하는 자가 분명한 인생길을 걸어갈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세상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믿음이 없는 자에게는 온 세상이 캄캄하고 소망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믿음을 가지고 보는 자의 눈에는 소망이 있고, 미래가 있습니다. 아무리 소망이 없어 보이고, 아무리 여러 가지 면에서 탄식스러운 일이 많아도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심을 믿으면서 그분을 통해 우리 주위 상황을 보면 우리는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모든 것을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이제 믿음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부활하신 주님께서 내 삶에, 내 영혼에 주인이 되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모든 축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이제 물러설 곳이 없음을 아십시오. 더 이상 저울질할 기회가 없음을 깨닫기 바랍니다. 이제 우리의 유일한 소망은 다시 사신 예수님 한 분 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부활하신 주님! 우리가 의심하지 않게 하옵소서. 자신의 생각과 헛된 호기심으로 인하여 그것을 통해 사단이 우리를 가지고 장난치지 않게 하옵소서. 우리는 주님의 것이오니, 주님의 제자로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의 믿음을 굳건히 하옵소서. 주님의 사랑과 은혜 안에 오늘도 살아감에 감사하오며, 이모든 말씀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