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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누리선교교회/한국어예배

요한복음 강해 76)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수요예배 20130410)

by 온누리선교 2013. 4. 10.

 

성경본문: 요한복음 21:15~25

15.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16.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17.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20.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님 주님을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더라

21.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23.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러라

24. 이 일들을 증언하고 이 일들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

25.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설교말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오늘 본문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세 번 질문을 하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세 번의 질문이 헬라어로는 첫 번째는 아가페의 사랑을 물어보시고, 두 번째도 아가페라는 단어를 쓰시고, 세 번째는, ‘필로스’ ‘필레오’라는 동사에서 나온 친구들 간의 우정의 사랑을 말하는 단어를 사용해서 물어보십니다.

아가페의 사랑은 ‘아가파오’라는 동사를 써서 물어보신 겁니다.

아가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을 말할 때, 또 전적으로 이타적이거나 완전히 헌신적인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아가페의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왜 아가페의 사랑을 하느냐, 아가페의 사랑을 하느냐, 필로스의 사랑을 하느냐, 세 번 반복합니까? 또 단어를 바꿔가면서.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 사랑은 이렇게 아가페, 아가페, 필로스, 세 겹으로 이루어진 사랑이 아니면 예수님 사랑하는 게 아니라는 얘깁니다.

 

 

15절 말씀입니다.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예수님께서 첫 번째, ‘네가 나를 아가파오 하느냐?’ 물어보십니다. 이때 베드로가 필레오 한다고 대답합니다. 자, 이 첫 번째 사랑은 어떤 사랑을 말하는 것일까요? 주님이 이렇게 단서를 붙이십니다,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요 21:15) 여기서 ‘이 사람들’은 헬라어 원어를 보면 ‘이것들보다’라고도 또는 ‘이 사람들보다’라는 말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이 사람들을 사랑하는 네 마음이 나를 사랑하는 마음보다 더 크냐, 작냐?’ 이렇게 물어볼 수 있는 거예요. 그런데 우린 흔히 이렇게 생각해요,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네가 나를 사랑하는 게 더 크냐?’ 이런 뜻으로 생각을 합니다. 그 뜻이 결코 아닙니다.

지금 여기에 이 글을 쓴 사도요한이 섞여 있었는데, 그렇다면 예수님을 사랑하는 베드로의 사랑보다 요한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랑이 더 적다는 말입니까? 그건 있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맡은 일은 다를 수 있지만, 베드로가 맡은 일이 수제자의 자리일 수는 있지만, 예수님에 대한 사랑에 있어서 도마나 사도요한이나 다른 제자들이 베드로에게 뒤질 수는 없는 겁니다, 그러므로 ‘요한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네가 나를 사랑하는 게 더 크냐?’ 이렇게 물어보신 게 아니라는 겁니다.

 

이 말씀의 전후 상황을 살펴보면, 베드로는 바닷가에 나가서 고기 잡다가 예수님을 만난 겁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뭐라고 물어보시느냐 하면, ‘베드로야!’ 하지 않으시고 ‘요한의 아들 시몬아!’ 이렇게 부르십니다. 무슨 뜻일까요?

베드로의 인생에서 예수님을 빼버리면 무엇이 그의 인생의 전부였을까요? 그 남는 인생 중에 자기가 할 수 있는 게 고기잡이였습니다. 예수님을 따라가기 전 먹고살기 위해서 가지고 있는 기술이라고는 어부로서 물고기 잡는 것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한 마리고기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지시하시니 고기를 가득 잡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들’이라는 것은 고기 잡는 배, 만선을 이룬 상태, 그리고 동네에서 같이 고기 잡으면서 잔뼈가 굵은 죽마고우들, 또 예수님을 좇으면서 제자로서 함께 동료가 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의 생업과 가족배경을 생각해서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고 부르신 이유가 있다는 겁니다. 이 세상의 호적상, 베드로는 요한이라는 사람의 아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호적상의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나서 이제까지 너의 삶의 내용을 채웠는데, 그 너의 인생내용 전체와 나, 둘을 놓고 사랑한다면 누구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묻고 계시는 겁니다.

 

이때 베드로가 예수님을 선택하겠다고 주저하지 않고 답합니다.

이 말은, 그러므로 이 첫 번째 아가페의 사랑은 베드로에게 있어서 가장 우선적인 가치를 무엇에 두어야 하는가였습니다. 그동안 경력, 인맥, 배경들 가운데서 살아왔고 책임져야할 사람들도 있지만, 베드로는 그것보다는 예수님을 먼저 생각하며 살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베드로의 모든 것의 우선이 예수님이 될 때, 베드로의 모든 것 자체가 예수님 중심으로 될 때, 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까요? 주님이 죽으신 십자가로부터 주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실 때,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베드로는 분명히 부활하신 주님을 따라 하늘까지 마음이 쫓아가게 돼서 마음이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천국 안에 머물게 되는 일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이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양을 먹이라!’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이제야 제자된 베드로에게 사명을 맡기십니다.

 

 

16절의 말씀입니다.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두 번째, 예수님의 질문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아가페오 하느냐?”입니다. 이 말은 “네가 나를 너의 인생의 목적, 주인으로 선택했으면, 이제 너의 인생 가운데 나를 위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느냐?"

당연한 일입니다. 베드로가 사랑한다고 말하니, 이제 예수님께서 물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바로, 살면서 예수님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일어날 때도, 잠을 잘 때도, 일을 할 때도 다 주님을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내가 사는 목적은 바로 주님때문인 것입니다.

예전에 전쟁 통에, 많은 어머니들이 과부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많은 자식들은 이 어머니의 사랑으로 살았습니다. 연약한 여인의 몸으로 아이들을 살리고,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억척스럽고 용감하게 세상과 맞서며 살았던 것입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낫 갈릴리 바다에서 사는 요한의 아들로서 살아왔지만, 이제는 주 예수님을 너무나 사랑하기에, 주를 위해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구체적인 사명을 베드로에게 주십니다.

“내 양을 치라” 나의 양을 돌보고, 먹이고, 다스리라는 말입니다.

 

 

17절의 말씀입니다.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첫 번째 아가페는 예수님 자신이 베드로의 인생에서 가장 우선이 되겠느냐를 물으시는 거고, 두 번째 아가페는 “나를 위해서 사느냐”를 물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세 번째로 “사랑하느냐?”라는 말의 뜻은 첫 번째와 두 번째에 비해서 수평적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예수님을 대상으로 바라보면서, 예수님을 향한 사랑을 첫 번째, 두 번째 질문에서 나타내었다면, 세 번째는 예수님과 함께 세상을 바라보고, 천국을 바라보면서, 어디든지 가는 그런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첫 번째, 두 번째에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는 헬라어 “아가페”라는 단어를 사용하였고, 세 번째에는 “필레오”라는 단어를 쓴 것입니다. 여기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말은 “네가 무엇을 하든지 나와 함께 하겠느냐? 나와 같이 바라보겠느냐?”라는 말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간에 예수님의 기쁨을 위해, 주님을 위해 사명을 가지고 한다하더라도 혼자 뛰지 말고, 어떠한 순간에도 주되신 예수님께 묻고, 예수님의 의견을 구하고, 예수님을 의식하고 함께 이 세상을 살아가겠느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정리하여 말하자면, 예수님께서는 당시 물어보았던 베드로에게 또 지금 우리에게 주님과 소통하고 교제하며 친밀함을 유지하면서 늘 함께사는 삶을 살겠느냐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에 베드로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고백이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진심과 열정을 아시는데도 왜 확인하려고 물어보십니까?라는 식의 대답을 우리가 가져야 될 줄 믿습니다. 베드로의 대답에 예수님께서는 “내 양을 먹이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베드로의 진심을 알고, 그 사랑의 확인을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18~19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행복해 집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너무 기뻤습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계셔서 아주 좋았습니다. 또한 세 번이나 주를 부인한 자신을 용서하시고, 사랑의 관계에서 사명을 주심도 정말 감사하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뜻대로 살려고 결심하고 그것만으로도 행복하였습니다. 그래서 젊어서는 베드로의 뜻대로 자유롭게 다녔으나,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간다”는 말씀을 듣고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성숙하면 내가 원하지 않는 일이라도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뜻이라고 하면 우리가 가장 귀히 여기는 것이라도 내어 놓을 수 있는 믿음이 생기며, 그럴 때 신령한 행복이 넘치게 됩니다. 빌립보서 3:8-9절에서 사도바울이 고백하기를,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베드로가 후에 거꾸로 십자가에 못박히는 순교의 자리에 갈 수 있었던 것도, 주님의 뜻대로 따를려고 결심하니 남모르는 기쁨이 넘쳤기 때문입니다.(요 21:18).

 

오늘 우리도 주의 일을 하면서 자기의 옛 생활이 다 죽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제물이 되기 위해서는 속의 것을 다 끄집어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옛사람, ‘나’ 라는 자존심... 이런 것들을 다 뽑아 낼 때, 주님의 뜻대로 순종하게 되고 남모르는 기쁨과 행복감이 넘치게 됩니다.

 

‘별세의 지도자’라는 책을 쓴 이중표 목사님이 고백하기를, 자기를 괴롭히는 교인이 한 사람 있어서 하나님 앞에 새벽마다 기도하며 “내가 도저히 괴로워서 못살겠습니다. 내가 가든지 그 사람을 보내시든지 해 달라”고 기도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음성이 들이는데, “사랑하는 종아, 그 사람을 꼭 내 보내야 되겠느냐? 그러나 그 사람은 다른 곳에 갈 곳이 없다. 다른 교회에 가도 그 버릇은 못 고친다. 내가 너를 인정하기에 맡기니 그를 잘 보살피도록 해라”하고 말씀하시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뜻이라면 기다리고, 참고, 죽겠습니다.” 하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니 주님의 사랑의 손길이 다가오면서 “내가 너를 위하여 면류관을 준비하고, 열 고을 다스릴 권세를 예비했다”하고 말씀하시므로 그는 넘치는 기쁨과 행복감에 감격하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뜨겁게 사랑했던 사람들은 세계사에 밝고 빛나는 위대한 장을 남겼습니다. 아브라함이나, 모세, 다윗, 베드로 등등... 주님 앞에 귀하게 쓰임을 받았던 믿음의 선조들도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므로 역사적인 위대한 장을 남겼습니다. 이들은 모두 주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였고, 그러한 순종의 삶속에 남모르는 기쁨과 희락이 넘쳤던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렇게 세 번 물어보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우리도 베드로와 같이 예수님을 3중으로 3겹으로 하는 이 사랑을 할 수 있을까요? 네 할 수 있습니다. 그 하는 방법은 단 한 가지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어보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과 함께 내 모든 정욕과 죄와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고 거기서 나 자신을 내려놓고 죽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를 행하면, 예수님께서 우리 인생의 전부가 되시어서 주님자체가 우리 삶의 기쁨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 어떤 것도 우리를 괴롭히지 못하게됩니다. 왜냐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일한 우리의 의미가 되시기에 다른 어떤 것도 우리에게 영향을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 주님과 함께 하지 않는다면 차라리 아무것도 안하겠다는 마음으로 살게 됩니다. 이러한 인생으로 살게 되면, 사업을 하든, 장사를 하든, 아이를 키우든, 목회와 전도의 자리에 있든, 주님께서 사명을 맡기실 것입니다.

 

세상에서 예수 믿는 것이 어렵다 말하십니까?

예수님을 한겹으로 아니고 세 겹으로 사랑해보십시오. 그리고 모든 것을 주 예수님께 맞추어 살아가보십시오. 그러면 주님과 함께함이 우리에게 세상이 알 수도 없고 줄 수도 없는 평안과 축복이 우리에게 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저와 여러분 모두가 끊임없이 주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 안에서 행복을 누리게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주님!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었음을 어느 때든지 어디서든지 고백하게 하옵소서. 이것을 통하여 주님을 향한 3겹의 사랑이 우리에게서 어디서든지, 언제든지 진짜로 나타나게 해주시옵소서. 그래서 주님이 맡겨주신 사명을 주님과 함께 수행해나가는 복된 삶을 살게 하여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와 늘 함께하시며 그 사랑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